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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않은 죄

김영국 (Homepage)	2023-06-12(월) 06:30:37, 46409

홀로코스트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은 15년 만에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었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그는 줄곧 무죄를 주장했다. 600만 명의 유태인을 죽인 실무책임자였으면서도 그는 상부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른 공무원이었을 뿐이라고 우겼다. 결국 교수형으로 결론이 났지만 이 재판은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는 타고난 악인이 아니었다. 아르헨티나의 이웃들은 그를 충실한 직장인, 따뜻한 가장, 평범한 이웃으로 입을 모아 증언했다. 정신과 의사들도 특별한 소견이 없다고 진단했다. 이 재판을 현장에서 지켜본 한나 아렌트(1906~1975 유태계 미국 정치철학자)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우리들 보통 사람들 내면에도 아이히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아이히만의 죄를 ‘생각하지 않은 죄’로 규정했다. 아무리 상부 지시라지만 그렇게 끔찍한 일을 수행하면서 그 일의 정당성 여부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 죄의 핵심이라고 했다.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은 전체주의사회를 풍자한 우화소설이다. 농장의 동물들을 규합하여 주인을 쫓아낸 돼지 일당은 동물들의 리더로 추대된다. 인간의 횡포로부터 해방된 동물들은 이제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되었다고 환호하고 기대한다. 기대에 부응하여 벽면에 칠계명을 써놓고 누구도 그 계명을 어길 수 없다고 선언한다. 새로운 기득권자가 된 돼지들은 벽면의 계명을 교묘하게 바꾸어 간다. 이를테면, 제5계명: ‘어떤 동물도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에 ‘지나치게’를 첨가한다. 제6계명: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에 ‘이유 없이’를  삽입한다. 압권은 제7계명이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를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들은 더욱 평등하다.’로 고친 것이다. 수정 작업은 순차적으로 밤에 이루어진다. 덧칠 흔적이 선명한데도 동물들은 눈치를 못 채거나,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스쳐지나간다. 결국 나폴레온을 비롯한 돼지 무리들은 견고한 전체주의 사회의 독재자로 특권을 누리고, ‘생각 없는’ 다른 동물들은 그 노예로 꾸역꾸역 살아간다.

히틀러 치하에서 생각 없이 살아간 사람은 비단 아이히만뿐이 아니었다. 당대 최고의 지성 하이데거를 필두로 거의 전 국민이 히틀러에 열광하고 나치즘을 지지하였다. ‘생각 없는’ 독일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히틀러는 유태인을 학살하고 2차대전을 일으켰다. 그 결과 수천만 명의 인명이 살상되고, 독일은 패망하였다. <동물농장>은 스탈린 치하의 소련을 풍자한 것으로 보고 있다. 생각 없는 동물들처럼 당시의 소련 인민들은 스탈린의 교묘한 술수를 묵인하고 그의 독재행각에 순종하였다. 그 폐해는 당시의 소련에 그치지 않고 오늘의 러시아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저 말도 안 되는 전쟁에도 러시아 국민들의 푸틴 지지율이 80%에 육박하고 있다니 ‘생각 없음’의 죄가 얼마나 심대한지 알 수 있겠다.

남 말할 처지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진영논리 하나에 함몰되어 생각 자체를 포기하고 산다.  특히 좌파의 확증편향은 콘크리트처럼 단단하다. 광우병 파동을 그들은 반성하거나 민망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경험을 살려 대통령을 탄핵시키는 역사를 만들었다고 뽐내며, 어게인 2017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천하의 위선자 조국을 수호하겠다고 수십만 명이 연일 촛불을 들었다. 아무리 사람이 없대도 그렇지, 어찌 이재명 같은 사람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고,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표를 몰아줄 수 있는가. 낙선 직후 혼자서 수억원의 주식을 매입했다. 세월호 침몰 직후 숙소에서 젖은 지폐를 말리고 있던 선장과 똑같은 레벨이다. 그런데도 좌파들의 눈먼 직진은 끝이 없다. 어이없게 만들어낸 어이없는 지역의 보궐선거에 그를 공천하여 당선시켜주고, 그것도 모자라 그를 당대표로 뽑아서 지금까지 저렇게 멀쩡하게 지켜주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경고했다.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서 앞으로 인류가 경계해야 할 대상은 <1984>(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의 빅브라더 같은 독재자가 아니라 극렬 팬덤이라고. 문재인의 ‘대깨문’, 이재명의 ‘개딸들’의 위력은 실로 대단하다. 이들 눈에 나면 그가 누구든 끝장이 난다. 정치인이면 정치생명이 위태로워진다. 멀쩡한 금태섭을 떨어뜨린 그들이다. ‘수박’으로 지목받은 사람들은 다음 공천 물 건너갔다고 봐야 한다. 일반인이면 문자 폭탄, 신상털기로  매장해버린다. 그러니 그들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다. 두려워서 말 못하는 사회는 이미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는 길은 그저 눈 감고, 귀 막고 입 닫는 길밖에 없다. 그냥 생각 없이 사는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생각하는 국민을 전제로 한 제도다.

이들이 말아먹은 것은 민주주의뿐이 아니다. 이들 때문에 도덕률마저 망가지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가 성폭행 문제로 500만불의 벌금형을 받았다. 이제 그의 대선 행보는 끝났다고 보았는데, 정치평론가는 크게 영향 받지 않을 거라 했다. 그 이유를 묻자, 대답은 간단했다. "Because it's Trump." 미국의 극우파나 우리의 좌파에게 도덕 따윈 이미 쓰레기다. 말도 안 되는 언행으로 지탄을 받을수록 후원금은 쏟아지고 공천 가능성은 높아진다. 대장동 몸통이 윤석열이라고 하면 그냥 그렇게 믿는다. 모든 범죄혐의는 ‘정치탄압’, 돈 봉투 뿌린 전임 대표는 ‘통큰 정치인’, 코인 타짜에겐 ‘검약한 사람’이라고 프레임을 씌우면 그들은 그냥 그렇게 믿고 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 세상엔 도덕 대신 뻔뻔함만 판을 친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조국의 딸 조민 현상 때문이다. 시험 한 번 치지 않고 가짜 서류로 의대생이 되고 의사 자격증까지 딴 주제에, 자기 때문에 엄마가 감옥에 있고, 아빠가 재판에 계류 중인데 그리고 온 나라가 그렇게 시끄러웠는데 저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나는 그 가족 전부가 조용히 어디 이민이라도 갈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더 절망한 것은 조민에 열광하는 좌파들이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그들은 감격하고 감동한다. 갈 데까지 간 집단이다. 민주화, 도덕적 우월성이 자기들 좌파의 자산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들의 토대였던 민주와 도덕을 스스로 패대기쳐버렸으니 그들은 이제 설 자리가 없다. 그러고도 저렇게들 뻔뻔하다. 그런데도 진영에 대한 그들의 지지율은 흔들림이 없다. 나라가 걱정이다. 생각해야 한다. 깨어나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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