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은 적인가 우군인가-이런 생각9 김영국  (Homepage) 2023-05-20(토) 06:11:39, 44231

감기를 심하게 앓았다. 늘 그래 왔듯 이번에도 타이레놀 몇 알로 넘어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특히 목이 너무 아팠다. 물은커녕 침도 삼킬 수가 없었다. 먹어야 할 약도 있고, 최소한의 음식도 섭취해야 하는데 한 번 한 번이 고통의 절정이었다. 침을 그렇게 자주 넘기며 살아왔는지를 몰랐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휴일이었다. 다음날 주사를 맞고 약을 먹으니 가라앉았다. 아, 소염진통제는 누가 만들었을까. 노벨의학상이라도 받았는지 몰라. 한 번도 의식하지 않고 침을 삼키고, 물을 마시고, 밥을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기적이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진통제도 없는 세상에서 모든 고통을 고스란히 몸으로 다 받아내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에 치아가 다 빠져버린 것이 들어있는 것에 언뜻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치통을 떠올리니 금방 고개가 끄덕여졌다. 32개의 치아 하나하나가 탈이 나서 빠질 때까지 그 고통이 오죽했겠는가. 한방의 진통치료를 받아보았는데 거의 기별도 오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러니까 각종 병이나 사고에 따른 모든 통증을 우리 조상들은 그냥 속수무책으로 견뎌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지긋지긋한 통증을 우리 몸을 지켜주는 수호천사, 의사 같은 존재라고 보기도 한다. 통증은 우리 몸을 보호하기 위한 반응이란다. 상처를 입고 피가 흐르는데도 모르고 지낸다면 과다출혈로 죽을 수도 있을 것이고, 복통을 느끼지 못하면 맹장이 터져 복막염으로 악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센 병 환자들의 손이나 발이 기형이 되는 것도 나균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나균이 신경을 파괴함으로써 손과 발이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 그 직접 원인이라고 한다. 간을 침묵의 장기라고 하는 이유는 통증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간이 거의 다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간 이식 수술까지 받아야만 했다.   날 때부터 통증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 파키스탄에 나비드라는 소년이 있었다. 이 소년은 그것으로 돈을 벌었다. 벌겋게 달구어진 돌 위를 아무렇지 않게 맨발로 걸으면 관중들이 박수를 치며 돈을 주는 것이었다. 소문을 들은 통증 연구자가 그 마을을 찾았을 때 그 소년은 죽고 없었다. 지붕에서 사다리도 없이 뛰어내리다가 죽었다고 했다. 처음엔 털털 털고 일어났으나 금방 쓰러졌다. 사인은 뇌출혈이었다. 나비드 열세 살 때 일이었다. 나비드 사촌 가운데 몇 명이 무통각증이었으나 모두 10대를 넘기지 못했다고 한다. 끙끙 앓으면서도 이 놈의 통증 덕택에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있다고 생각하면 견디기가 훨씬 나으리라 생각된다. 통증에 대해 또 하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은 통증을 기피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통증에 다가가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작가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여행>을 읽으며 시종 고개를 갸웃거렸다. 17일 동안의 여정이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져있어 안나푸르나를 내가 걷고 있는 느낌으로 읽었다. 그런데 단행본 한 권이 다 끝나가기까지 트레킹의 기쁨이나 보람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감기, 고산병, 불면의 밤 등 견딜 수 없는 고통들만 연속되었다.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고 나서 비로소 동행들과 얼싸안으며 감격했을 뿐이다. 가관인 것은 그래 놓고 또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었다. 그 고통의 시간들을 금방 그렇게 잊었단 말인가. 조셉 프랭클린 박사는 ‘고통상쇄안도감’이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자해시도자들로 하여금 얼음물에 손을 넣게 하거나, 전기 충격 자극을 주고 나서 측정한 결과 안도감과 만족감이 현저히 증가했음을 발견했다. 대조군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보였던 것이다. 무거운 배낭을 지고 등산을 하는 목적이 정상에 올랐을 때의 순간적 쾌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건강 증진만도 아닐 것이다. 땀 뻘뻘 흘리며 오르는 과정, 뻑적지근한 다리의 통증 등을 즐기는 것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러너스 하이 runner's high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죽지 않을 정도의 통증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통증은 무찔러 박멸할 인간의 적인가, 아니면 더불어 공존해야 할 우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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