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의 추억 김영국  (Homepage) 2021-07-04(일) 08:02:02, 16957

우리 면에 있는 중학교를 마다하고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했다. 10km 넘는 거리를 걸어서 다녔다. 난생 처음 본 2층 건물의 읍내 초등학교를 나온 애들한테 지레 주눅이 들어 기를 펴지 못했다. 통학 길에 이해할 수 없는 안내판을 자주 만났다. ‘공사 중 서행’, ‘서행’이면 서쪽으로 가라는 말인데 그쪽으로는 길이 없었다. 산에 나무를 심어놓고 내세운 간판이 ‘사방공사’였다. 사방에 공사를 했단 말인가. 버스 승강구 상단에 빨간 글씨로 씌어있는 말은 그야말로 넘사벽이었다. ‘인화물질지입금지’ 이 뜻을 언제쯤 알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 고등학교 때까진 몰랐던 것 같다. 수업시간에는 모르는 말 투성이었다. 주눅 든 촌놈 주제에 질문은 언감생심이고, 그냥 그렇게 넘어갔다. 지각동사 사역동사의 개념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개념을 모르니 to부정사 문제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지각은 지각생의 지각밖에 몰랐고, 사역은 군대 가서 사역병이라는 말을 일상으로 쓰면서 알게 되었다. 교감신경 부교감신경은 교감선생님의 교감 때문에 뜻을 잡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다. 목적어도 목적지 목적 등의 단어가 오히려 개념 파악의 걸림돌이 되었다. 부분일식에 대응하는 말이라면 전부일식이어야지 왜 개기일식인가. 고등학교에 가니 어려운 말이 더 많아졌다. 설명을 들을 땐 가까스로 이해가 되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그 설명은 지워지고 생소한 말만 남았다. 개념과 낱말을 기계적으로 외울 수밖에 없었다. 달달 외웠지만 시험장에선 헷갈리기 일쑤고, 시험이 끝나면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지고 말았다. 후배 선생님들한테 수업에 관해 얘기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빠뜨리지 않고 다음 얘기를 했다. 중고등학교 수업은 그 교과목 내지 학문의 기본개념을 가르치는 것이다. 기본개념은 그 학문의 학술용어에 담겨있다. 학술용어의 대부분은 일본이나 중국으로부터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한자어로 되어있다. 개념의 핵심이 뜻글자인 한자에 농축되어 있다. 개념을 설명할 때 한자를 활용하면 설명도 쉽고 이해도 빠르고 기억도 오래 간다. 이를테면 민주와 군주의 차이도 한자로 설명하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자를 가르치자는 얘기가 아니다. ‘백성 민’ ‘임금 군’ ‘주인 주’를 쓸 줄 모르고 읽을 줄 몰라도 관계없다. ‘민’은 ‘국민’ 할 때 민, ‘군’은 ‘폭군’ 할 때 군, ‘주’는 ‘주인’ 할 때 주라고만 상기시켜 주면 된다. 그런 용어를 지금도 만들어 쓰고 있다. 새로운 문물 이 들어오면 말도 따라 들어온다. 그 말을 그대로 쓰거나 우리 식으로 바꾼다. 우리말로 바꿀 때 조어력이 뛰어난 한자에 기대게 된다. 그런 한자어가 국어 사회 과학 영어 등에 광범위하게 침투해있다. 뜻글자로 이루어진 용어들을 소리글자처럼 주입하면 선생님도 힘들고 학생도 힘들 뿐 아니라 학력도 떨어진다. 균역법 개기일식 상실배 사역동사 등을 가르칠 때 한자를 활용해보라. 균등의 균, 개근의 개, 사신의 사로 연결 지으며 설명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학생이 많아진다. EBS 강사가 ‘상실배’를 가르치는 걸 우연히 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뽕나무 열매 오디를 닮아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상실의 뜻이 무엇인지를 언급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이름과 모양과 개념을 따로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뽕나무 상, 열매 실을 잠시만 짚어주면 유레카 소리가 저절로 터질 텐데 생물 일타강사가 안타까웠다. 기존지식과 새 지식을 연결 짓는 훈련은 뇌의 시냅스 발달에도 기여하고, 학생들의 어휘력도 기하급수적(좀 심했나?)으로 늘어나게 한다.(개근 개기의 개를 연결 지워본 학생은 ‘국민개병제’의 뜻을 사전 찾지 않고 알지 않겠는가.) 좌파 교육감, 전교조가 교육계의 주류가 되면서 성취도평가 등 시험을 기피하는 바람에 학생들의 학력이 급격하게 저하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어느 대학교수는 중고등학생의 학력저하가 대학생들의 어휘력에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고 걱정했다. 한 학생에게 ‘이지적’이라고 칭찬을 했는데 반응이 예상 밖이어서 알아봤더니 그는 ‘이지’를 easy로 받아들여 헤픈 여자로 본 것 같아 기분 나빴다고 했단다. 다른 학생에게 “자네는 의외로 고지식한 데가 있어.” 했더니 칭찬으로 받아들여 해해거렸다. 그는 ‘고’를 high로 생각하여 우쭐했다는 것이다. 저 대학생들이나 추억 속의 나나, 무식한 이유는 같은 데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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