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맹랑한 편견들 김영국  (Homepage) 2021-07-14(수) 08:17:19, 16982

#1. 고려대 한때 연고전은 국민적 관심사였다. 신문에 보도되고 TV에 중계되기도 했다. 나에게도 꽤 큰 관심사였다. 내가 고대 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고대를 응원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우리 가족이나 지인 가운데 고대를 나온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고대를 가본 적도, 고대생을 만나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왜 고연전이 아니고 연고전이라 하는지 그런 하잘것없는 데도 신경을 쓸 만큼 고대 편이었다. 그 이유를 가만히 더듬어보니 어느 선생님의 수업 중 잡담 때문이었다. 연대에는 도시의 부잣집 애들이 들어가는 데 반해, 고대에는 시골에서 올라온 촌놈들이 다니는 학교라고 했다. 기생 오래비 같은 연대생과 촌티가 줄줄 흐르는 고대생은 한눈에 구별된다고 했다. 서울로 진학할 처지도 안 되면서도 그때부터 그냥 고대가 좋아졌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내 생각을 강화시켜 줄 어떤 경험도 없었는데도 그 고정관념은 꽤 오래 남아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물론 이쪽도 저쪽도 아니고, 아예 관심 자체가 없어진 상태다. #2. 영국 월드컵 때 유럽 팀 중 유달리 잉글랜드 팀에 마음이 쓰였다. 예선에서 탈락하기라도 하면 그래도 축구 종주국인데 저럴 수가 하고 안타까워했다. 오래된 얘기지만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전쟁이 났을 때 나는 영국을 응원했다. 그 전쟁의 원인이 무엇인지, 누가 나쁜 나라인지 따져보지도 않고, 영국의 승전보에 안도하고 환호했다. 내가 영국 편이 된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내 이름 때문이다. 이름의 ‘영’은 꽃부리 영도 아니고 길 영이다. 그러니까 발음도 다르다. 그런데 그걸 모르는 무식한 친구들이 내 이름과 영국이라는 나라를 결부지었다. 지리나 역사 시간에 영국이 나오면 짝꿍은 나를 보고 웃었고, 주번이 시간표를 칠판에 적는데 영어와 국어가 이어지면 그 뒤에 이상한 말을 붙여 나를 놀리기도 했다. 어른이 되어서는 과람하고 터무니없게도 나를 두고 ‘영국 신사’라는 별명을 붙여 불러주기도 하였다. 그렇게 하여 저 먼 영국이 내 나라라도 되는 양 그 나라를 걱정하고 그 나라를 응원하였던 것이다. 이 맹랑한 생각이나 감정은 솔직히 아직도 그 흔적이 조금은 남아있다. #3. 까마귀 요즘 까마귀가 부쩍 늘어난 것 같다. 계절도 시간도 따지지 않고 까악까악 운다. 반면에 까치 소리는 좀체 들을 수 없다. 까마귀 울음소리가 유독 듣기 싫은 것은 어린 시절부터 세뇌된 까닭일 것이다. 까마귀가 울면 하루에 몇 번이라도 어머니는 퉤퉤 침을 뱉었다. 어떤 때는 곁에 있는 나도 그렇게 하라고 시켰다. 동네에 뭔가 흉한 일이 일어날라치면 아침부터 까마귀가 그렇게 울어쌓던 일을 상기하기도 했다. 도쿄의 딸네 집에서 자고 난 새벽, 바로 집 옆에서 까마귀가 울어댔다. 그런데 딸이나 사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낮에 보니 한국의 까마귀는 견줄 수도 없을 만큼 컸다. 소리도 더 음흉하고 부리는 흉악하게 생겼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본에서는 저 새가 길조란다. 일본 축구협회 앰블럼으로 사용되고, 까마귀를 모신 신사도 있다고 한다. 춘향전에서 까마귀가 우는 꿈을 꾼 춘향이가 절망하며 울고 있을 때 점쟁이가 어떻게 울더냐고 묻는다. 가옥가옥 울더라고 하니, 아름다울 가佳, 집 옥屋이라, 집안에 좋은 일이 있을 징조라고 해몽을 한다. 그리고 알다시피 암행어사가 출도한다. 반대로 까치는 서양에서 흉조로 여긴단다. 언젠가 우체국이던가 기관의 상징으로 까치를 채택했다가 부랴부랴 취소한 적도 있다. 그런데도 까마귀와 까치에 대한 고정관념은 좀체 지워지지 않는다. 산책로에서 까마귀 울음소리를 듣고 마스크를 쓴 채로 퉤퉤 침 뱉는 시늉을 하는 나를 발견하고 스스로 한심해한다. #4. 여자 외모 여자의 외모에 대한 취향의 변화는 아마 나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 또래가 어릴 때 어른들한테 알게 모르게 들은 말이 외모 판단의 기준이 되었을 것이다. 가장 보편적인 칭찬이 복스럽게 생겼다는 말이다. 살이 통통하게 붙어있는 여자를 그렇게 일렀다. 그 다음 칭찬이 부잣집 맏며느리 감이었다. 얼굴이 보름달처럼 둥글고 큰데다 몸매가 넉넉한 여자를 일컫는 것 같았다. 우리 사촌누나는 키가 좀 컸다. 170 정도 됐을까. 큰어머니는 그게 흠이라도 되는 듯 걱정했다. 아담 사이즈를 조신한 여자라 선호했던 것 같다. 발그레한 혈색은 도화살 운운하고, 눈가의 웃음은 바람기라 하여 꺼렸다. 열거된 그때의 기준들은 지금은 완전히 반대가 돼버렸다. 세상이 바뀌니, 내 눈도 생각도 취향도 시나브로 시류에 따라가고 있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없어지고 나니, 연예인들 특히 여자 아이돌들이 미의 기준이 되고 있다. 하나같이 불면 날아갈 것 같다. 미스 트롯2의 선발과정을 보면서 노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외모도 은연중에 채점에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되었다. 모두 얼굴은 조막만 하고, 키는 늘씬늘씬하고, 다리는 젓가락처럼 가늘고 길었다. 옛날 같으면 시집은 엄두도 못 낼 외모다. 그런데 나도 어느새 그들의 외모에 혹해 그들이 나오는 프로를 기다린다. 그리고 둥글고 큰 얼굴, 통통하고 짧은 다리를 안쓰럽게 바라보게 되었다. #5. 일본   일본에 대한 내 생각도 시간 속에 흔들리고 있다. 처음엔 당연히 철저한 반일주의자였다. 내가 참여한 유일한 데모가 한일회담 반대였다. 초임지 서여중(현 당리중)에서 학생회를 내세워 일제학용품 불태우기 행사를 했다. 거친 나의 일 처리에 선배 선생님의 걱정도 있었고, 학부모의 항의 전화도 많았으나 독립운동이나 하듯 밀어붙였다. 어느 회식 자리에서 분위기가 무르익자 교장선생님이 일본 노래를 불렀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 그리고 개념 있는 교사 행세를 했다. 그런데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 그런 험악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 이병철 박태준 같은 사람들이 혹은 담대하게 혹은 비루하게 일본에 손을 내밀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한일회담 당시 양국의 GDP는 29:1이었으나, 60년이 지난 지금은 3:1로 좁혀졌다. 가전, 반도체, 제철, 조선, IT, 대중문화 등은 이미 일본을 추월하였다. 개인 구매력, 국가신용등급에서도 역전하였다. 이제 일본은 우리가 고개 치켜들고 바락바락 덤벼들 가치도 없는 나라로 전락하고 있다. 우리가 제대로만 나아간다면, 일본이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연민의 대상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코로나와 올림픽이 결정타가 될 것이다. 친일파, 죽창가, 토착왜구 등의 철지난 구호에 나는 진저리친다. 서슬 푸르렀던, 젊은 날의 반일은 이렇게 퇴색돼버렸다. 돌이켜보면 내가 가졌던 생각들을 그때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듣고 누군가로부터 배웠고 또 내 나름으로 판단한 것이기 때문에 흔들릴 수 없는 생각이고 믿음이고 취향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내놓고 보니 그 생각의 근거가 참으로 터무니없었거나, 생각의 깊이가 너무도 얕았다. 물 위에 떠,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밀려다니는 부평초 같은 생각에 내가 부대끼며 살아온 것이다. 그런 맹랑한 생각이 비단 위 다섯 가지일 리가 없다. 특히 개인, 이를테면 동료나 친구 그리고 학생을 이런 어처구니없는 편견으로 대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오금이 저려온다. 떠날 날을 목전에 두고서야 이를 깨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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