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망 교육의 추억12-일제 학용품 화형식 김영국  (Homepage) 2019-05-06(월) 09:10:42, 2922

새내기 교사 2년차쯤 됐을까. 교내계(학생 규율 지도)에다 학생회를 맡게 되었다. 교내계로서 교문 지도를 통해 두발 단속 등 혁혁한 공(?)을 세운 터라, 학생회 담당으로 또 뭔가를 해보겠다는 과욕이 발동했던가. 일제 학용품 화형식을 기획하게 되었다. 서여중은 지금의 사하구에 위치한 당시로는 가난한 학군이었다. 그 지역과 영도 출신 학생들 속에 군계일학처럼 사립 남성초등 학생이 각 교실에 한둘 앉아있었다. 남성초등은 부산 최고의 귀족학교로 유명했다. 그들은 외모부터 달랐다. 소설 ‘소나기’의 서울 소녀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학생들의 부러움은 말할 것도 없고 선생님들로부터도 주목을 받았다. 그 학생은 학급의 반장이 되고 학부모는 육성회 임원이 되어 찬조금을 부담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반학생들이 꿈꿀 수 없는 많은 것을 누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학용품이었다. 대개가 일본산이었다. 연필만 해도 일제는 때깔도 곱고 깎기도 쉽고 심도 잘 부러지지 않을 뿐더러 글씨도 잘 써졌다. 지우개도 그랬고 크레파스 같은 것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것을 바라보는 일반 학생들의 시선이 안타까웠다. 그런 가운데 분실 사고가 각 교실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교육적으로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일제가 아닌가.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그러니까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는 교실 앞이나 뒤에 큰 글자 네 개가 늘 붙어있었다. ‘반공 방일’이 그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공산당과 일본은 무조건 적이라고 세뇌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산림녹화’와 함께 ‘국산품 애용’이었다. 그리고 대학 시절에 내가 참가한 유일한 데모가 ‘한일 회담 반대’였다.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했지만 그건 배알도 없는 매국이라고 분개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수업 중에 마음먹고 일본 얘기를 꺼내었다. 그놈들의 만행을 열거해놓고는  그런데도 중학생들이 일제 학용품을 사용하고, 그것을 부러워하고, 그리고 그것을 훔치는 행위는 얼마나 개념 없는 행동인가를 역설했다, 학생들이 크게 감동하는 것 같았다. 지금 당장 소지하고 있는 일제를 앞으로 던지라고 했다. 멈칫멈칫하다가 남성초등 출신이 던지니 여기저기서 마구 날아왔다. 의외로 일반 학생들도 상당수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 있는 것도 가져오라고 부추겼다. 거기서 고무된 나는 학생회장단을 불러 다음 학생회 의제를 ‘일제 학용품 추방 운동’으로 하자고 종용했다. 학생회에 가서 이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학급 단위로 경쟁을 붙였다. 내가 수업 들어가는 교실만큼은 아니라도 거교적인 호응이 있었다. 학부모로부터 항의성 전화도 오고 교무실 구석에 수집된 일제 학용품이 전시된 것을 보고 선생님들이 수군거렸다. 그러나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은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드디어 점심시간에 학생회 주관으로 ‘일제 학용품 화형식’을 거행했다. 학생회장은 이 운동의 취지와 의미를 설명하고, 쌓아놓은 학용품에 기름을 부은 뒤에 불을 붙였다. 저 불길 속에 일제 선호 사상을 불태우자 등의 구호를 회장이 외치고 학생들은 복창하며 박수를 쳤다. 요란했던 과정에 비하여 의식은 좀 어설펐다. 학용품을 태운 흔적은 스탠드 위에 한참 남아있었으나 그날의 마음가짐은 얼마나 학생들의 의식 속에 살아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최근 느닷없는 친일 담론으로 어느 지자체에서 학교의 모든 교구 중에 일제에 딱지를 붙이자는 제안이 나와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그 일이 망각 속에 묻혀있던 50년 전의 기억을 되살렸다. 누구든 반일을 이야기하고 민족을 내세우면 그는 금방 개념 있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교활한 정권은 그것을 정략으로 이용하고, 순진한 국민들은 그때마다 흥분하고 박수를 친다. 내가 벌인 그것도 같은 맥락이 아니었을까. 용일(容日)과 용일(用日)이 극일(克日)의 길이라고 믿고 있는 지금의 내가 그날의 나를 바라보기가 자못 불편하다. 그리고 나의 치기만만한 언행을 선배 선생님들 특히 교장 교감 선생님은 어떻게 보았을까를 생각하니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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