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하착 放下着 김영국  (Homepage) 2019-04-05(금) 19:32:27, 2567

한 장님이 길을 가다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에서 떨어졌습니다. 가까스로 나뭇가지를 붙들었습니다. 거기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소리쳤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스님이 그 광경을 보았습니다. 다행히 장님은 땅과 가까운 높이에 있었습니다. “그냥 놓으시오.” “안 됩니다. 놓으면 죽습니다. 제발 좀 살려주세요.” “괜찮습니다. 바로 아래가 땅입니다. 놓아버리시오.” “안 됩니다. 살려주세요.” 스님과 장님이 실랑이를 하는 사이 힘이 빠진 장님이 결국 가지를 놓아버렸습니다. 가볍게 엉덩방아를 찧은 장님은 멋쩍은 듯 툭툭 털고 일어섰습니다. 미망의 중생이 사소한 것에 집착하여 생명이나 명예를 걸거나, 힘이나 시간을 허비하는 모습을 빗댄 이야기입니다. 돌아보면 놓아버릴 대상, 놓아버릴 시기를 알지 못해 정작 귀한 것을 놓친 경험이 많을 것입니다. 며칠 전 아침, 식탁에서 사과를 깎다가 사과를 놓쳤습니다. 늙으니까 뭘 자주 떨어뜨리게 되더군요. 그 사과를 다시 잡을 기회가 네 번 있습니다. 식탁에서 구를 때, 거기서 다리 위로 떨어질 때 허벅지에 잠시 머물 때, 그리고 거기서 바닥에 떨어질 때입니다. 역시 늙으면 동작이 느려지고 둔해집니다. 그날 네 순간을 다 놓치고 결국 사과는 거실 바닥을 굴렀습니다. 별 것도 아닌 일인데 자책하고 낙담하고 하루 일진도 생각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내 손에 들려있는 칼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과도를 든 오른손과 빈 왼손으로, 굴러 떨어지는 사과를 잡겠다고 허둥댄 것입니다. 안 다쳤기 망정이지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어이가 없었습니다. 사과가 무엇인데 그리고 그것이 거실 바닥에 떨어진다고 사과가 어떻게 된다고 그렇게 사생결단으로 칼을 들고 야단을 쳤단 말인가. 정작 자책하고 낙담할 것은 사과를 놓치고 사과를 다시 못 잡은 것이 아니라 칼과 사과를 놓아버리지 못한 나의 모자람이었습니다. 시인 이성복의 시를 읽으며 나를 달랬습니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이성복 버스가 지리산 휴게소에서 십 분 간 쉴 때 흘러간 뽕짝 들으며 가판대 도색잡지나 뒤적이다가 자판기 커피 뽑아 한 모금 마시는데 버스가 떠나고 있었다 종이컵 커피가 출렁거려 불에 데인 듯 뜨거워도 한사코 버스를 세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가쁜 숨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 회청색 여름 양복은 온통 커피 얼룩 화끈거리는 손등 손바닥으로 쓸며 바닥에 남은 커피 입 안에 털어 넣는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그냥 두고 올 생각은 왜 못 했던가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는 삶은 꿈이다 *방하착 放下着 : 내려놓아라. 내버려라. 불교에서 화두로 주로 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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