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문물 검역소 김민서  (Homepage) 2010-01-05(화) 07:35:17, 8367

'신 문물 검역소'는 무서운 신인작가 강지영의 첫 장편소설입니다. 미스터리와 멜로, 모험의 여러 요소들을 능숙하게 엮어 맛깔스러운 소설을 탄생시켰네요. 조선선비 함복배는 과거급제 후 제주의 '신 문물 검역소'라는 곳에 첫 부임을 하게 됩니다. 이곳은 외국의 사신들이 가져와 임금께 진상한 신 문물의 용처를 파악하여 보고문을 작성하는 임시 기관의 성격을 띠고 있답니다. 함복배가 직접 작성한 보고문 몇 편을 소개합니다. ------------------------------ ** 불아자 두 개의 볼록하고 둥근 천을 이어 붙인 두건으로 아니 불, 높을 아, 놈 자자를 써 불아자라 칭하였습니다. 서양 벼슬아치가 사용하던 관모로 추측되오며 관리라 함은 모름지기 백성을 섬기는 낮은 자리의 사람이라는 뜻으로 불아자라 이름 지었습니다. 입수한 불아자는 봉이 두 개지만 고급 관리일수록 봉의 개수가 늘어날 것으로 추측됩니다. 추후 외국에 사신을 보낼 때 벼슬아치의 관모도 불아자로 바꾸심이 어떠한가 아룁니다. ** 치설 항문에 질환이 있는 자가 사용하는 의료 용구로 추측되는 도구입니다. 긴 막대의 끝에 짐승의 갈기로 보이는 뻣뻣한 털이 붙어 있습니다. 손잡이인 막대로 치핵을 밀어넣고 털이 달린 부위로 항문 주변을 잘 문지르자 치질이 완화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심한 변비가 있는 아녀자나 찬 곳에서 장시간 둔부를 방치하는 상인의 치질 예방에 사용이 가능하나 그 용도가 항문에 쓰이므로 타인의 도구를 공용하기는 곤란할 것으로 보입니다. 치질 치, 가죽 설자를 써서 치설이라 명명하였습니다. 앞으로 가정 상비용품으로 보급하는 것이 어떠한지 아뢰옵니다. ** 만앙경 길게 끌 만, 편할 앙, 볕 경자를 써서 만앙경이라 부르는 이 물건은 부싯돌 없이도 불을 붙일 수 있는 도구로 종이처럼 마른 것에 유리를 통해 햇볕을 투과하면 그 끝에 볕의 열기가 모아져 불이 붙는 원리입니다. 부싯돌을 사용하다 보면 닳아 없어지거나 크기가 작아 분실하기 쉽지만 만앙경은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입니다. 단, 해가 없는 장마철이나 밤에는 사용이 불가능하므로 부싯돌과 함께 비치해 사용하는 것이 옳은 사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곤도미 연하고 얇은 가죽을 단련해 만든 물건으로 반 자 정도 되는 길이입니다. 손가락 두 개가 들어가면 조금 넉넉할 정도의 이 물건은 서양에서 바느질을 할 때 손가락에 끼고 쓰던 골무로 추측되옵니다. 조선에서는 과부나 가난한 여인네들이 생활고를 덜고자 삯바느질을 하는데, 이때이 물건이 요긴하게 사용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곤할 곤, 인도할 도, 어루만질 미자로 곤도미라 이름 지었으며 이는 가난을 어루만진다는 뜻으로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강인한 조선의 여인들을 달래줄 귀한 물건이라 생각됩니다. ** 선풍기 주물로 만든 원형 틀에 노를 닮은 오동나무 막대 다섯 개가 붙어 있고 그중 두 곳에 쌀 한 되와 한 되반가량 무게의 추 두 개가 달려 있는 물건으로 천장 서까래에 중심을 맞춰 걸어놓으니 저절로 돌아가며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고급 목재를 사용하지 않고 그 크기를 줄인다면 저렴한 값에 보급이 가능하며 여름철 곡식을 보관할 때나 연회 시에 각광받는 신 문물입니다만, 바람의 세기나 영역을 조절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므로 추후 우수한 발명 인재를 동원하여 보완한다면 조선의 명물로 손색이 없으리라 판단됩니다. ------------------------------ 재미있지요? 위에 용처를 연구하여 밝힌 것들이 어떤 물건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겠지요?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신문물의 요절복통할 연구 과정과 기발한 보고문, 나중에 박연이라는 이름을 얻은 제주에 표류한 네델란드인 벨테브레, 외국의왕에게 선물로 받았으나 살인죄를 쓰고 제주에 유배를 오게 되는 코끼리, 어지자지 기수영이라는 기이한 인물, 혼인을 앞둔 처녀들의 연쇄살인사건 등의 이야기가 아주 유쾌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지루한 시간을 달랠 무언가가 필요하신분은 챙겨보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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