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시’ 사러 안 왔소 김정식  (Homepage) 2010-05-04(화) 08:40:25, 3484

‘나시’ 사러 안 왔소    어느 여대생이 옷가게에서 소매 짧은 속옷을 찾으니, 주인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옆에 있던 다른 옷가게 주인이 “아～, 나시인  갑다.” 하니, 그제야 “아～ 예, 나시 있습니다.” 하며 옷을 찾는다.    마침 일본말을 조금 알고 있던 여대생은 “소데나시(소매 없는 옷)면 소데나시지, 나시는 또 뭐요? 나는 배[梨=나시] 사러 안 왔소.”하며 그냥 나가더란 얘기가 있다.    좀 과장된 얘기인지 몰라도 이런 기특한 여대생이 있는가 하면, 아예 영어로 ‘노 슬리브(no sleeve)’라고 일컫는 여성도 있으니 너무 대조적이다. 외국말을 함부로 쓰는 것도 문제지만, 남의 나라 말을 멋대로 잘라 버리고 쓰는 것은 문화인의 자세가 아니다.      우리말로는 ‘맨팔옷’, ‘민소매’라는 말을 쓰면 된다. '맨팔옷’은 한글 학회 편『쉬운말 사전』에 나오고 ‘민소매’는 새말로 요즈음 언론에서도 많이 쓰고 있는 말이다.   ‘민-’이란 접두사는 ‘～가 없는’의 뜻이 있다. ‘민물’은 ‘소금기가 없는 물’이고, ‘민머리’는 ‘벼슬을 못해 감투를 쓰지 못한 사람’이다. ‘민무늬’, ‘민꽃식물’도 있다. 이 같은 조어법에 따라 ‘소매가 없는 옷’은 ‘민소매’라 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반소매, 깃소매, 민소매’로 계열을 이룰 수 있어 좋다.    <일본말 부스러기>    19세기에 와서 긴 동안의 ‘닫힌 사회’를 무너뜨리고 ‘열린 사회’를 형성하는 데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일본이었다. 당시 우리는 보고 듣고 생각하는 거의 모든 행위를 일본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굴절시켜야만 했다. 더구나 35년 동안의 일본 통치는 생각과 감정의 표현 수단인 우리의 말글마저 말살하여 겨레 문화를 단절하려 했다.   그 동안 뜻있는 많은 분들의 노력이 있었건만, 광복된 지 65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일본 말글의 부스러기는 온갖 형태로 우리말 속에 스며들어 겨레얼을 좀먹고 있다.   ‘에리, 와리바시, 기스, 와리깡’ 들이 아직도 일상 생활에서 즐겨 쓰이는가 하면, 목수나 이발사, 미용사, 인쇄공, 양복점의 재단사들은 일본말이 아니면 아예 벙어리가 되는 형편이다. 심지어 사회 지도자나 교수들까지도 ‘음～, 어～’를 일본식으로 ‘마～, 에또～’하고 있으니, 어쩌면 더듬거리는 말까지도 일본을 닮는단 말인가?   일본이 서양 문물을 우리나 중국보다 먼저 받아들였기에,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인격, 의식, 낭만주의, 화학, 진화론’ 같은 학술 문화에 관한 말들은 대부분 일본 학자들이 번역한 한자어로 채워져 있다. 이러한 일본식 한자어 유입은 지금도 계속되어 ‘공해, 월부, 분양, 핵가족, 성인병, 불쾌 지수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이런 말들을 모두 거부할 순 없지만 ‘당분간(얼마 동안), 삼인분(세 사람치), 할증료(웃돈), 필히(꼭, 반드시)’ 처럼 뚜렷한 우리말이 있는데도 무턱대고 일본식 한자말을 쓰는 행위는 삼가야 할 것이다.     발음에서도 겜뽀우(헌법), 붐뽀우(문법), 고우까(효과), 지껭(사건) 등의 된소리 습관 때문으로 [헌뻡], [문뻡], [효꽈], [사껀] 들로 소리내고 있다. 일본말은 받침을 제대로 발음 못 하는데다 모음도 ‘a, i, u, e, o’의 다섯뿐이다. 그러니 서양말을 발음할 때, ‘기부스(깁스), 빳다(배트), 테레비(텔레비전), 히로뽕(필로폰)’처럼 모음을 바꾸거나 받침 없는 비슷한 소리로 흉내내어 말한다.   또, 서양어를 지나치게 줄인 것으로 ‘매스컴, 리모콘, 마이크, 레미콘’ 따위가 있고, 본바닥에는 없는 변조한 일본식 영어로 ‘리야카, 슈크림, 백미러, 샤프 펜슬’ 들이 있는가 하면, 서양말과 일본말 또는 한자말을 섞어 만든 것으로 ‘가라오케, 재테크, 만땅꾸, 돈까스’ 따위도 있다. 우리말은 소리가 매우 풍부하여 영어를 원음에 가깝게 발음할 수 있는데도, 남의 발음을 따라 흉내낸다는 것은 제 정신을 빼 놓은 바보 짓이다.   어디 그뿐인가.  ‘땅’이나 ‘대지’를 두고도 ‘부지(敷地)’를, ‘태도’나 ‘처지’를 두고도 ‘입장(立場)’을 쓰고 있으며, ‘애매(曖昧)’나 ‘수속(手續)’을 버리고 ‘모호’나 ‘절차’를 써야 한다니까 ‘애매모호’와 ‘수속 절차’란 말까지 만들어 쓰고 있다.      이처럼 우리말 속에는 일본말의 자취가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뿌리 깊게 스며 있다. 너무 생활화하여 있으므로 어떤 것이 일본어의 영향인지 찾기조차 힘들게 되었다. 이 분야의 전문 학자들이 앞장 서서, 이들을 씻어 버릴 것과 받아 들일 것으로 엄정히 갈라, 씻어낼 것은 국민 운동을 통해 줄기차게 씻어내야 한다. 지금도 계속 들어오고 있는 일본말을 더욱 경계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우리 생활 속에 스며 있는 일본의 부스러기들을 깨끗이 청산하고, 겨레말을 통한 올바른 겨레 문화를 창조하여 일본과 당당히 맞서야 할 것이다. 이것이 국제화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국민의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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