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면 봄이 오고 있습니다. 정일근  (Homepage) 2013-02-04(월) 11:34:57, 3719

날이 추울 때 기다려지는 것은 꽃입니다. 꽃이 피어야 봄이 오기 때문입니다. 옛 시인들은 추위 속에서 피는 매화를 사랑했고, 그 중에서도 눈 속에서 피는 설중매를 으뜸으로 꼽고 시를 남겼습니다. 그래서 옛 시인들은 나귀의 등에 앉아서 매화를 찾아가는 탐매행을 격조 높은 취미로 즐겼다고 합니다. 오늘은 양산 통도사 홍매를 친견하러 가는 길입니다. 절집에 모신 부처를 찾지 않고 꽃을 먼저 찾는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때로는 부처 몰래 즐기고 싶은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통도사 홍매는 엄동설한에 피는 꽃입니다. 지난 해 제 적바림을 뒤져보니 음력으로 1월 초순에 꽃망울이 맺혔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꽃을 보기는 아직 이르지만 붉게 숨쉬는 홍매 꽃망울을 보려고 통도사를 찾았습니다. 봄과 가을 그 좋은 시간들을 두고 홍매는 통도사 마당에 얼음이 꽝꽝 소리나게 어는 추운 계절에 꽃을 피웁니다. 처음에는 안타까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북풍한설 찬 날씨에 이를 악물고 꽃을 피우려는 것에 마음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홍매가 꽃을 피워야 통도사의 봄이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홍매가 피어야 진달래가 피고, 진달래가 피어야 산수유가 피듯 꽃들이 차례차례 자연의 순서를 지키게되는 것이었습니다. 봄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입니다. 누군가 이 추위 속에서 봄을 만들고 빚는 손이 있기에 봄은 오는 것입니다. 통도사의 봄은 대자대비하신 '그분'도 몰래, 동안거 선정에 든 수좌들도 모르게 매화나무가 만들고 있습니다. 뿌리는 땅 속 깊은 곳에서 더운물을 끌어올리고, 나무는 그 물들을 가지 끝으로 보내고, 가지는 그 물로 붉은 꽃망울을 빽빽하게 만들어 다는 것입니다. 홍매는 꽃잎이 붉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매화의 품종을 기록한, 조선조 초기 학자 강희안(1417-1464)의 '양화소록'에 따르면 '홍매는 백매에 비하면 따뜻한 감이 있고 청초한 가운데서도 요염함 자태가 있어 여성적이다'고 했습니다. 백매는 남성적이고 홍매는 여성적입니다. 그런데 재미있지 않습니까. 스님네들이 살고 있는 절집에 요염한 홍매가 핀다는 것이! 누가, 언제 홍매를 심었는지 알지는 못하나 그 사람도 통도사에 홍매를 심는 것에 많이 조심했나 봅니다. 홍매는 통도사 극락보전 뒤편에 숨은 듯이 서 있습니다.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쉽게 만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오래 전에 읽은 소설가 조성기의 <통도사 가는 길>이란 작품이 생각납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통도사를 찾아와서야 '통도(通道)'가 '통도(通度)'라는 것을 압니다. 그렇습니다. 통도사 홍매를 찾아가는 길도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뛰어넘어야 만나는 인연입니다. 통도사는 저와 인연이 깊은 절입니다. 제 아버지의 고향이 이곳입니다. 그 덕분에 저는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통도사 행을 즐겼습니다. 세상 떠돌다 통도사 가까이 살면서는 더 깊은 인연이 만들어졌습니다. 극락선원 명정 스님에게 차를 배웠고, 서운암 성파 스님에게서는 쪽빛을 배웠습니다. 통도사 홍매는 활짝 피지 않았습니다. 날씨가 계속 포근하다면 아마 2월10일쯤 절정을 이룰 것 같습니다. 홍매 만나러 갔다가 성파 스님을 뵈었습니다. 스님은 중국에서 홀로 그림공부를 하고 계십니다. 왜 스님이 절을 떠나 이국에서 고생입니까?, 여쭈었더니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인연을 끊고 절집에 들어와 40여 년을 살다보니 세상에서 만든 인연 보다 더 많은 인연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 인연을 끊기 위해 그림 속에 숨었다." 깨달음은 꽃이 피듯이 찾아옵니다. 저는 그 순간에 통도사 홍매가 피는 소리를 듣고 향기도 맡았습니다. 오늘은 입춘입니다. 곧 설이 오고 정월 대보름도 옵니다. 그러면 석 달 동안 동안거에 들었던 대안 스님, 도심 스님-제 도반들이 눈빛 더욱 깊고 맑아져 나오실 것입니다. 그 때 같이 홍매를 찾아가 볼 작정입니다. 그 땐 즐겁게 동행해 주실 수 있겠지요? 참! 아시는지요. '세종실록지리'에 울산군에서 나는 매실이 지방특산물이어서 소금에 절인 염매를 토공으로 임금에게 바쳤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울산에도 뿌리 깊은 매화나무가 있을 듯 합니다만. 우리는 많은 것을 잊고 삽니다. 입춘대길. 닫아놓은 창문을 열어보십시오. 봄이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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