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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흘구곡과 한강 정구 그리고 내고향 창녕
2023-10-19(목) 07:43:15, 55122
5월 1일 보았던 수도산의 연달래가 일주일이 지나면 절정일 것 같아 5월 7일 아침 일찍 수도산으로 향했다. 일기예보에서 김천지역은 비가 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가는 도중에 계속 비가 오고 있다. 일기예보가 매시간 다르다. 성주에 도착하자 비가 오락가락하고 있다. 전날 비가 많이 와 수도산 정상까지 가는 것은 무리라 판단되어 일주일 전에 주마간산 격으로 보았던 무흘구곡을 제1곡부터 9곡까지 제대로 보기로 했다.



(무흘구곡 안내도)

무흘구곡은 성주군 수륜면에서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까지 약 35㎞에 이르는 대가천과 옥동천 계곡에 걸쳐 있다. 무흘구곡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 선생의 칠언 절구의 시다. 송나라 주자(朱子·1130~1200)가 지은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만든 시로 제1곡인 봉비암에서 출발하여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 제9곡인 용추폭포까지의 경관을 한 편의 시에 담았다.



성주에 1~5곡, 김천에 6~9곡이 있지만 정구선생이 살았던 당시에는 모두 성주였다. 1곡과 2곡은 성주군 수륜면에 있다. 1곡인 봉비암(鳳飛巖)은 회연서원 뒤편에 있는 산봉우리로, 높이는 약 10m의 암벽이다. 절벽 아래로 대가천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회연서원)

회연서원은 정구선생이 1583년에 회연초당을 지어 제자를 가르치던 곳을 인조 5년(1627)에 선생의 뜻과 학덕을 추모하고자 초당을 헐고 건립한 서원으로 숙종 16년(1690)에 사액 받았다. 봉비암이라는 명칭은 봉황이 나는 듯한 모습으로 보여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과 기생 ‘봉비(鳳飛)’가 춤을 추다가 실족해 빠져 죽은 연못 봉비연(鳳飛淵)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전해진다. 봉비연은 이후 회연(檜淵)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곡 봉비암)

칠언 절구의 시를 지어 노래한 「무흘구곡(武屹九曲)」의 무흘은 굳셀 무(武)에, 산 우뚝 솟을 흘(屹)이다. 이는 아홉 굽이의 빼어난 산수의 경관을 한 구절이 일곱 글자 네 구로 된 칠언 절구로 노래한 것이다. 제1곡 ‘봉비암(鳳飛巖)’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曲灘頭泛釣船(일곡탄두범조선), 첫째 굽이 여울목에 고깃배 띄우니
風絲繚繞夕陽川(풍사료요석양천), 해지는 냇가에 실 같은 바람 감도네
誰知捐盡人間念(수지연진인간념), 뉘 알리오, 인간 세상의 근심 다 버리고
唯執檀槳拂晩煙(유집단장불만연), 박달나무 삿대 잡고 저녁연기 휘저을 줄을

봉비암을 보면서 봉이 나는 것을 연상하거나, 봉이 날아가고 터만 남았다며 안타까워하였다고 하는데, 날아간 봉은 때로 정구로 인식되기도 했다. 봉비암 위에는 반석이 있어 굽이쳐 흐르는 대가천을 내려다보거나 제2곡인 한강대(寒岡臺)를 건너다볼 수 있다.



(2곡 한강대)

제 2곡인 한강대(寒岡臺)는 무흘구곡 제1곡인 봉비암 건너편에 있다. 한강대는 천변에 솟은 20~30m가 넘는 암벽이다. 정구선생의 호인 한강(寒岡)이 여기에서 나왔다고 한다. 한강대는 9곡 중 접근성이 가장 까다롭다. 그런데 ‘회연서원 명상의 길’을 1곡 봉비암과 2곡 한강대 사이에 2㎞의 황톳길로 조성하여 접근성이 좋아졌다. 한강대 정상에서 대가천을 내려다보면 굽이도는 물길과 아름다운 산천이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선생은 한강대를 봄꽃과 가을 단풍으로 단장한 아름다운 미녀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2곡 한강대)

二曲佳妹化作峰(이곡가매화작봉) 이곡이라 어여쁜 여인이 봉우리로 변하여
春花秋葉靚粧容(춘화추엽정장용) 봄꽃과 가을 단풍으로 아름답게 단장했네
當年若使靈均識(당년약사령균식) 먼 옛날 초나라 굴원에게 알게 하였다면
添却離騷說一重(첨각이소설일중) 이소에다 한두 구절 보탰으리라



​한강대를 나와 제3곡인 ‘배바위(선암, 船巖)’로 가려면 차로 20여 분을 달려야 한다. 성주호를 끼고 자연과 인간과 자동차가 조화를 이루면서 도는 드라이브 코스다. 성주호는 1992년 완공되어 성주군과 고령군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성주호 둘레길)



성주호 주변에는 가고 싶은 길이 있는데 2개의 코스로 되어 있다. 1코스는 성주호 둘레길이란 이름으로 성주호를 한 바퀴 도는 약 11.9km의 길이다. 2코스는 독용산성, 독용산 전망대, 금봉리 숲을 잇는 약 12km의 독용산성 등산로이다. 이 두 코스를 합하면 23.9km이나 된다.



(독용산성)

가을에 단풍이 아름답다고 하여 올가을에 다시오리라고 마음을 먹고 제3곡으로 향했다.

제3곡 배바위는 바위의 모습이 배처럼 생겨 이곳 사투리로 배바우라 불린다. 주암(舟巖) 또는 선암(船巖)이라 하기도 하고, 검은 학이 맴돌다 날아갔다 하여 무학이라고도 한다. 한강선생은 3곡을 아래와 같이 노래했다.



(3곡 배바위)

三曲誰藏此壑船 (삼곡수장차학선) 삼곡이라 누가 이 골짜기에 배를 숨겼는가
夜無人負已千年 (야무인부이천년) 밤에 질 사람 없어 이미 천년을 흘렀네
大川病涉知何限 (대천병섭지하한) 큰 내는 건너기 어렵거늘 끝이 어디인가
用濟無由只自憐 (용제무유지자련) 건널 방법 없으니 다만 절로 가련하네



(4곡 선바위)

배바위에서 4.2㎞ 정도 떨어진 거리에 계곡 옆에 우뚝 솟은 바위가 있는데 이를 선바위 즉 입암(立巖)이라고 한다. 전날 비가 많이 와 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다. 선생은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1579년)’에서 입암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흰 돌이 평평하게 펼쳐져 있는데 매끄럽기가 잘 다듬은 옥 같고, 푸른 물은 잔잔히 흐르는데 맑기가 밝은 거울 같다. 우뚝 솟은 바위는 높이가 오십 장쯤 된다. 비틀린 소나무가 바위틈에서 자라는데 늙었지만 키는 크지 못했다. 백옥 같은 너럭바위가 수면에 드러나 있고 삼사십 명은 앉을 만하다. 맑고 기이하며 그윽하고 고요한 분위기는 얼마 전에 구경한 홍류동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또한 무흘구곡에서는 제 4곡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四曲雲收百尺巖(사곡운수백척암) 넷째 굽이라 백 척 바위에 구름이 걷히니
巖頭花草帶風髮(암두화초대풍발) 바위 위에 꽃과 풀이 바람에 흩날리네
箇中誰會淸如許(개중수회청여허) 그 중에 누가 이러한 청정함을 만나겠나
霽月天心影落潭(제월천심영낙담) 하늘에 개인 달그림자가 못에 드리우네



(5곡 사인암)

선바위를 나와 대가천의 풍광을 천천히 드라이브를 즐기면서 도착한 곳이 제5곡인 사인암이다. 사인암은 높이가 약 30m의 암벽으로 기이한 모습이다. 사인암은 고려 시대에 한 관리가 이곳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관인(官印)을 버리고 이곳과 영원히 인연을 맺고 살기를 원했던 곳이라 하여 사인암(捨印巖)이라고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때의 사(捨)는 버릴 사이다. 또 사인(舍人) 벼슬을 한 스님이 살았다 하여 사인암(舍人巖)이라 한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우산을 쓰고 거닐기에 적당히 비가 내려 천변을 한참을 거닐었다. 비가 많이 왔지만 깨끗한 일급수이다. 선생도 이곳의 맑고 깊은 못을 노래하고 있다.



(5곡 사인암)

五曲淸潭幾許深(오곡청담기허심)오곡이라 맑은 못이 얼마나 깊은가
潭邊松竹自成林(담변송죽자성림) 못가의 솔과 대가 절로 수풀 이루네
幅巾人坐高堂上(폭건인좌고당상) 유건 쓴 이 높은 당 위에 앉아서
講說人心與道心(강설인심여도심) 인심과 도심을 강설하네



(5곡 사인암)

내려갈 때 미처 보지 못한 정자 안에는 한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준비해온 음식으로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와 함께 있다. 아마 어버이날을 맞이해 온 것 같다.
제5곡 사인암을 나와 천변을 따라 올라가면 대가천과 옥동천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나온다. 이곳이 제6곡 옥류동(玉流洞)이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 흰 암반 위에서 옥처럼 맑게 흘러 옥류동이라고 한다.



(6곡 옥류동)

六曲茅茨枕短灣(육곡모자침단만) 육곡이라 띠집이 짧은 물굽이에 자리하니
世紛遮隔幾重關(세분차격기중관) 세상의 시비를 막는 것이 몇 겹이나 되는가
高人一去今何處(고인일거금하처) 고인은 한번 가니 지금은 어느 곳에 있는가
風月空餘萬古閑(풍월공여만고한) 풍월이 속절없이 남아 만고에 한가롭네

이곳에서 선비들이 초가를 짓고 독서와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지고한 사람이라도 한 번 가면 다시 볼 수가 없는 것이 인생이고 풍월만 남아 있다는 의미로 느껴진다.
옥류동을 따라 이어지는 천변 둑길을 걸었다.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대가천 최상류를 따라 올라가자 황점마을과 황점신앙유적지가 나왔다.





(황점신앙유적지 마을)

이곳은 병인박해를 피해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살던 마을이다. 황점신앙유적지 마을을 돌아보고는 더 이상 길이 없어 다시 나오자 갈 때는 미처 보지 못한 장전폭포가 나왔다. 폭포의 상, 하단으로 가는 길을 데크로 잘 조성해 놓았다.



(장전폭포)

폭포를 보는 순간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굉장한 폭포다. 폭포 상단에는 신선들이 바둑을 두었다는 바둑판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상단을 나와 폭포 하단으로 가는 계단은 아주 가파르다. 하단에서 바라보는 폭포의 모습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폭포의 형태다. 가로 폭 10미터, 높이 약 8미터 정도에서 폭포가 떨어지고 있다. 비 때문에 수도산의 연달래의 향연은 보지 못했지만 장전폭포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바둑판)

장전폭포를 보고는 다시 큰길을 나와서 수도암 방향으로 올라가면 제7곡 만월담(滿月潭)을 만날 수 있다. 만월담은 옥동천 변에 있다. 그런데 만월담은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주변의 우거진 수목에 의해 경관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달빛이 가득 찬 아름다운 연못이라 하여 만월담이라고 한다.

七曲層巒繞石灘(칠곡층만요석탄) 칠곡이라 층층의 봉우리 돌여울 둘러 있어
風光又是未曾看(풍광우시미증간) 이러한 풍광 또한 일찍이 보지를 못했어라
山靈好事驚眠鶴(산령호사경면학) 산령이 잠든 학을 깨우는 일 좋아하니
松露無端落面寒(송로무단락면한) 소나무 이슬이 무단히 얼굴에 떨어져 차갑네

한강 선생은 연못에 가득 찬 달빛이 돌여울에 비치는 모습을 노래한 듯하다.



(8곡 와룡암)

7곡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제8곡 와룡암(臥龍巖)이 나온다. 바위의 모습이 길게 누운 한 마리의 용과 같다고 하여 와룡암이라고 한다. 이 와룡암은 제9곡 용추폭포에 살고 있던 용이 승천한 바위라고 한다.

八曲披襟眼益開(팔곡피금안익개) 팔곡이라 옷깃을 헤치니 눈이 더욱 열리는데
川流如去復如廻(천류여거복여회) 시내가 흘러가다 다시 돌아오는 듯하여라
煙雲花鳥渾成趣(연운화조혼성취) 안개 구름 꽃 새 모두 정취를 이루니
不管遊人來不來(불관유인래불래) 유인이 오든 말든 관계하지 않을래라



(8곡 와룡암)

시에는 용이 누워있다는 내용이 없고, 냇물이 흘러내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같다는 의미가 용이 승천하듯 꿈틀거린다고 생각된다.



(9곡 용추폭포)

8곡을 보고 조금만 올라가면 무흘구곡의 마지막인 제9곡 용추폭포((龍湫瀑布)가 나온다. 17m 높이에서 쏟아지는 용추폭포의 물줄기는 무흘구곡 최고의 풍광이다. 폭포의 모습이 절구처럼 생겼다 하여 ‘구폭(臼瀑)’으로도 불렸다. 예부터 마을 사람들은 절구처럼 생긴 폭포 안에 용이 산다고 믿었다. 용은 비를 몰고 다니는 존재라고 여겨 가뭄이 들면 용추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나면 반드시 비가 내렸다고 한다.



(9곡 용추폭포)

九曲回頭更喟然(구곡회두갱위연) 구곡이라 머리 돌려 다시 탄식하니
我心非爲好山川(아심비위호산천) 나의 마음 산천을 좋아하지 않아라
源頭自有難言妙(원두자유난언묘) 원두는 말하기 어려운 묘처가 있으니
捨此何須問別天(사차하수문별천) 이를 버리고 어찌 별천지를 묻겠는가

구곡의 내용은 실제 용추폭포의 실경에 관한 내용은 하나도 없다. 이곳은 구곡의 종착지로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실현 공간이라고 여겨진다.



(9곡 용추폭포)

무흘구곡을 지은 정구선생은 나와도 인연이 있다. 나의 모교인 유어초등학교의 교가에 나오는 팔락정과 나의 본적지 마을 이름인 가항을 지은 분이다. 당시 교가의 가사 내용에는 ‘수려한 무수산에 병풍을 두른 듯’으로 시작하여 ‘등대에 부는 바람 무 배추 살찌고 팔락정 경산으로 장관 이루세’로 끝이 난다.

등대는 내가 태어난 마을로 무 배추가 아주 잘 자라는 낙동강 변 선상지에 있는 마을이다.



(창녕군 유어면 미구리 팔락정)

팔락정(八樂亭)은 등대에서 직선거리 1km쯤 떨어진 경상남도 창녕군 유어면 미구리에 있는 정자이다.
정구선생은 창녕 현감으로 부임하여 백성의 교화와 인재 양성을 위해 1580년에는 팔락정을 세워 직접 학문을 가르치고 장려하였다고 한다. 그 뒤 1852년(철종 3)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팔락정은 단층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아직도 그 형태는 튼튼하다. 또한 팔락정은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8경으로 선정하여 그 풍경을 즐긴다는 뜻이다. 여덟 가지 즐거움이란 다음과 같다.



1, 맹호도강(猛虎渡江) 강 건너 지형이 범이 건너오는 듯한 형세를 보는 즐거움으로 범의 대가리에 해당되는 바위를 어릴적 독대바구라 불렀다.
2, 원포귀범(遠浦歸帆) 강 멀리서 포구로 돌아오는 돛단배를 보는 즐거움이다.
3, 평사낙안(平沙落雁) 평평한 모래펄에 내려앉는 기러기 떼를 보는 즐거움이다.
4, 북지홍련(北池紅蓮) 정자 북쪽 팔락늪에 피어 있는 홍련을 보는 즐거움이다.
5, 역수십리(逆水十里) 앞 개울물이 강물 흐름의 반대로 십 리를 흐르는 것을 보는 즐거움이다.
6, 전정괴수(前庭槐樹) 정자 앞뜰의 회화나무를 보는 즐거움이다.
7, 후원오죽(後園烏竹) 정자 후원에 있는 오죽을 보는 즐거움이다.
8, 서교황맥(西郊黃麥) 정자 앞 서쪽인 등대들에 보리가 누렇게 익은 풍경을 보는 즐거움이다.



(팔락정)

팔락정이 있는 미구마을 물줄기인 역수 십리는 가항마을 앞을 지나 토평천까지 이어진다. 토평천은 우포늪에서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하천이다. 가항마을은 이 두 줄기 물길에 둘러싸인 형상이다. 당시에는 낙동강이 역류하면 토평천이 마을로 범람해 들어오곤 했다. 마을 뒤편 야산 목덜미(項)가 꺼져 있었기 때문에 여기를 정구선생이 돋우(加)었다. 그 후 수해가 사라져 집과 논밭이 안전해졌다. 이후에 마을 이름이 목덜미를 돋게 했다고 하여 가항(加項)이 되었다. 가항을 순 우리말로는 ‘더묵’이라 한다. 이는 조선시대 토목건축 가운데 지금까지 그 내력이 전해져 오는 아주 드문 사례라고 한다. 지금도 나의 본적지 집 주소가 창녕군 유어면 가항리 820번지이다.



(팔락늪 북지홍련)

한강 정구(1543~1620)선생은 1543년 7월 9일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유촌에서 태어났다. 38세 때인 1580년(선조 13년) 4월에 창녕현감으로 부임하여 1581년 9월까지 1년 5개월의 짧은 기간에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창녕 사람들은 임기를 마치고 떠난 후에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다. 정구선생이 돌아가신 다음 해인 광해 25년(1621)에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관산서원(冠山書院)을 세웠다. 숙종 37년(1711)에 사액이 내려져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는 창녕 유일의 사액서원이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복원하지 못하고, 1899(광무 3) 서원 터에 관산서당(冠山書堂)을 세웠다.



(창녕군 고암면 관선서당)

한강 정구선생은 영남학파의 두 거봉인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제자이자 미수 허목의 스승으로 이황 다음으로 많은 서원에 제향되었다. 아쉬운 것은 1805년 영남 유림들이 문묘에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과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 1554-1637) 네 분을 문묘에 종사하게 해달라고 청원을 올리려는데, 누구를 앞에 적느냐에 문제가 생겼다. 한강과 여헌은 관직의 높낮이를 크게 중시하지 않은 분들이라서 나이순으로 학봉을 앞에 올렸다. 그러자 서애 쪽에서 서열이 잘못됐다고 따로 상소를 올렸다. 이에 조정에서는 아예 모두를 기각해 버렸다. 이는 병호시비(屛虎是非)의 피해를 본 것이다.



병호시비는 병(屛)은 병산서원(屛山書院)이고, 호(虎)는 호계서원(虎溪書院)을 지칭하는 말이다. 병산서원과 호계서원 중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를 가리자는 것이다.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선생을 지칭하고, 호계서원은 학봉 김성일선생을 지칭한다. 이 두 분은 살아 생전에는 퇴계선생에게 함께 동문수학한 수제자들로서 매우 사이가 좋았다. 그런데 그 후손들이 다툼이 벌어진 것은 퇴계선생을 모신 호계서원(당시 여강서원)에 수제자 두 분을 함께 모시고자 했다. 그런데 퇴계선생의 왼편에 누구를 모시느냐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다.



왼편에 누구를 모시느냐에 따라 제자의 서열이 정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나이는 학봉이 네 살이 많고, 벼슬로 보면 서애는 영의정이고 학봉은 경상감사였다. 서애 쪽에서는 영의정 벼슬이 더 높으니 서애를 왼쪽에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고, 학봉 쪽에서는 나이로 보나 학문으로 보나 학봉을 윗사람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서애와 학봉의 인물이나 학문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서애의 사상을 따르는 제자들과 학봉의 사상을 숭상하는 제자들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가치평가를 받느냐의 문제이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풍산 류씨와 의성 김씨 간의 자존심 대결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양반관료의 최고 명예는 문묘배향공신이 되는 것이다. 문묘배향공신은 정공신이나 종묘배향공신보다 더 높은 명예를 누렸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문묘배향공신을 배출한 가문은 최고의 학자 가문으로 존경을 받았다. 국가에서는 기회가 되는 대로 그 후손들을 특채하였다.
병호시비만 안 일어났어도 정구선생의 후손들인 청주(淸州) 정(鄭)씨도 많은 혜택을 받고 최고의 학자 가문으로 존경을 받았을 터인데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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