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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산행 안내 (연대봉, 천성산, 천마산, 좌광천, 백양산, 윤산, 오봉산, 지줌산, 백양산, 동매산, 황령산, 일광산, 봉화산, 서생포, 배산, 수영강, 산성산, 상곡마을, 산성산)


김천 수도암과 수도산
2023-09-21(목) 08:52:28, 56139
훌륭한 세프들 덕에 아침을 든든히 먹고는 자연휴양림을 나와 수도암으로 향했다.



수도암은 수도리 마을을 지난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무흘구곡 전시관이 있다. 수도리 가는 길과 나란히 흐르는 냇물은 옥동천이다. 옥동천의 경관 중 빼어난 세 곳은 무흘구곡 중 칠곡 만월담, 팔곡 와룡암 그리고 마지막 구곡인 용추폭포이다. 구곡인 용추폭포는 인현왕후길과 연결되어 있다.
숙종의 계비였던 인현왕후는 당쟁으로 인한 장희빈과의 암투로 폐서인이 되어 이곳 청암사 극락전에 3년간 머물면서 수도암을 오가며 기도하였다고 한다. 이 인현왕후가 걸어다녔다는 청암사에서 수도암까지의 8.1km 산책길을 인현왕후길로 이름 붙여 둘레길로 조성하였다.



용추폭포를 지나면 수도리 마을이 나온다. 수도리는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 하지만 해발은 그리 높지 않다. 수도리부터는 찻길은 좁고 복잡해진다, 오르막을 힘겹게 올라 수도암에 도착했다. 봉황루를 통과해 경내에 들어 다시 높은 계단을 오르면 상단에 이른다.



상단에는 대적광전, 동서삼층석탑, 약광전이 나란히 있다. 30여 년 전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대적광전 앞에서 바라본 가야산 상봉은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상단에 오르자마자 저절로 눈길이 정면 가야산을 향하였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많은 명당들을 보아 왔지만 첫눈에 반한 명당은 이곳이었다.



아름다운 경치와 명당은 설명이 필요 없다. 보는 순간 감탄사가 터져 나와야 좋은 경치고 명당이다. 수도암이 바로 그런 곳이다. 수도암은 우리나라 풍수의 원조인 도선국사가 청암사를 창건한 후 수도처를 찾다가 지금의 이 절터를 발견하고는 칠일 밤낮 동안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는 곳이다. 도선국사의 마음을 알 것만 같다.



이곳에서 보는 가야산 상봉은 연꽃이 피어오르는 앙련(仰蓮)으로 보이기도 하고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보는 사람에 따라 여러 형태로 보인다. 옛사람들은 수도암 터를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으로 보았다. 가야산 상봉은 실을 거는 끌개 돌이 되고, 뜰의 양 탑은 베틀의 두 기둥이 되며, 대적광전 불상이 놓인 자리는 옥녀가 앉아서 베를 짜는 자리가 된다. 이를 풍수이론에서는 형국론이라고 한다.



형국론은 산의 모양을 사람의 행위나 동물, 식물 등 물체에 비유하는 이론이다. 형국론은 우주 만물은 저마다 모양이 있고, 모양을 이루는 곳에는 그 모양에 상응하는 기(氣)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옥녀직금형은 옥녀가 베틀에 앉아 베를 짜는 형국이다. 혈은 옥녀의 젖가슴이나 복부에 있다고 한다.



(석조 비로자나불)

수도암에서 혈의 자리는 비로자나불이 앉아있는 곳이 된다. 옥녀직금형의 특징은 거부가 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 수도암은 다른 암자들에 비해 건물들이 웅장하고 화려하게 보인다.



나의 할머니 세대만 해도 밤을 새워 베를 짰다고 한다. 인간의 삶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의식주(衣食住)인데 베틀로 짜는 옷감이 의(衣)인 셈이다. 그러나 지금은 베틀에다 베를 짜는 사람은 없다. 풍수 이론도 시대에 맞게 변해가야 한다고 생각된다.



(가야산 상왕봉과 칠불봉)

수도암에는 보물 세 점이 있다. 대적광전에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수도암 동·서 삼층석탑, 약광전 석불좌상이다. 석조비로자나불상은 가야산 정상을 정면으로 바라보듯 정 중앙에 앉아 있다. 이 자리가 최고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이 불상에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불당골이라 불리는 거창 가북면 북석리에서 만들어져 이곳으로 옮겨올 때 불상이 너무 크고 무거워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도 힘겨워 쩔쩔매고 있었다. 그러던 중 늙은 스님이 나타나 불상을 가볍게 등에 업고 순식간에 달려갔다. 그런데 수도암 입구에서 그만 칡넝쿨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화가 난 노승은 불상을 내려놓은 뒤 산신을 불러 “부처님을 모시고 오는데 칡넝쿨이 웬 말이냐! 앞으로는 절 주위에 일체 칡이 자라지 못하도록 하라”고 호통을 치고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지금까지 이 절 근처에는 칡덩굴이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석조 비로자나불 봐상)

비로자나불상은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불상의 크기는 대좌를 포함하여 약 4m에 이른다. 이는 석굴암 불상보다 80cm만 작을 뿐이다. 비로자나불은 진리를 상징하는 법신불을 형상화한 불상이다. 비로자나는 부처의 가장 궁극적인 모습인 진신이자 법신불과 동일시된다. 이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있는 전각을 대적광전(大寂光殿) 또는 대광명전(大光明殿)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을 봉안하게 된다. 또 비로전(毘盧殿) 또는 화엄전(華嚴殿)이라 할 때는 비로자나불만을 봉안한다.
비로자나불상은 보통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결가부좌를 한 자세로 앉아 있다. 지권인은 왼손 집게손가락을 펴 세워서 위쪽 오른손 주먹 속에 넣는다.



(석조보살좌상)

대적광전 옆에있는 약광전에도 보물로 지정된 수도암 석조보살좌상이 있다. 도선국사가 조성했다고 전해지는 고려 초기 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머리에 원통형의 관(冠)을 쓰고 있어서 보살상으로 불리지만, 학자에 따라서는 보관을 쓴 비로자나불상이란 주장도 있다. 마모가 심한 편이지만 코가 오뚝하고 입술이 두툼하다.



(석조보살좌상)

이마에는 커다란 백호가 있다. 백호(白毫)는 부처님 미간에 있는 하얀 털을 말한다. 백호는 당기면 저 멀리 뻗어 나갔다가 놓으면 오른쪽으로 말리면서 돌아온다고 한다. 백호는 부처님의 신체적인 특징인 삼십이상 팔십종호(三十二相 八十種好) 즉 32가지 두드러진 특징과 80가지 미세한 특징 중 대표적인 것이다.
우리 친구들 중 불심이 깊은 불자 친구들에게 수도암에 시주하고 기도하면 기도발이 아주 세어 소원성취가 이루어지니 열심히 절을 올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무신론자라 과거에는 종교를 아편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돌덩어리에 절을 한다는 것은 용납이 안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삶의 허무를 극복하고 희망을 심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불상에 절은 하지 않아도 겸손한 마음으로 합장은 하게 되었다.



(도선국사비)

약광전을 나오면 약광전 앞에는 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로 추정된다는 도선국사비가 있다. 도선국사비에는 刱主道詵國師(창주도선국사)가 새겨져 있다. 刱(창)은 창(創)과 동(同)자이다. 이 글자는 일제강점기에 판 것으로 이 글자 때문에 본래의 글자 50여 자가 더 훼손되었다고 한다.



(도선국사비 김생 친필 추정)



(갈항사지 동탑 명문과 탁본)



(단속사 신행선사비)



(봉화 태사자 낭공대사탑비)

이중 김생이 쓴 ‘원화3년(元和 3, 808년) 비로자나불상’이라는 내용이 추가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김생의 서체로 알려진 것은 김천 길항사지 동탑 상층기단 명문과 산청 단속사 신행선사비와 봉화 태사자 낭공대사탑비의 글씨라고 한다.



대적광전 앞에는 석등이 있고 그 좌우로 삼층석탑이 있다. 신라의 석탑은 중국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우리 고유의 양식이다. 목탑과 전탑의 두 가지 양식을 모두 갖춘 의성 탑리 오층석탑을 시작으로,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은 전탑 형식의 잔재를 청산하고 오로지 석탑 자체의 양식으로 나아간다.



(의성 탑리오층석탑)




(나원리 오층석탑)

이어 고선사 삼층석탑과 감은사 삼층석탑에서 5층 구조를 3층으로 바꾸면서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틀이 완성된다.



(고선사 삼층석탑)

이어 황복사 삼층석탑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통돌로 만들어, 감은사 석탑의 몸돌과 지붕돌이 하나가 아니고 4개의 돌로 짜 맞춤으로써 생기는 거친 선의 결점이 없어진다.



(감은사 삼층석탑)



(황복사지 삼층석탑)

마침내 불국사 석가탑에서 무결점의 완벽한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전형이 되어 통일신라가 추구한 이상적 조화미가 완성 되었다.



(불국사 석가탑)

이는 고전 건축의 3대 요소인 비례, 균형, 조화가 완벽하게 이룬 탑이 바로 석가탑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에서는 전형으로부터 일탈하는 이형(異形)탑이 등장한다.



(불국사 다보탑)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이형탑은 그 형태가 다양하여 불국사 다보탑,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처럼 형태를 완전히 달리하거나 오층, 칠층, 십삼층으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또 기단부와 몸돌에 조각이 곁들어지기도 한다.
다층탑의 예로는 경주 장항리 서 오층석탑,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경주 정혜사 십심층석탑 등이 대표적이다.



(경주 장항리 서오층석탑)



(충주 탑평리 7층석탑)



(경주 정혜사 13층석탑)

신라 하대로 들어오면 삼층석탑에 일정한 변화가 나타난다. 탑의 크기가 평균 7.5m에서 5.5m 내지 4.5m로 축소된다. 그리고 지붕돌의 층급받침이 5단에서 4단으로 줄어들고, 기단부와 1층 몸돌에 장식 조각이 곁들여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전형의 창조 뒤에 나타나는 매너리즘 현상”이라고 유홍준 교수는 설명한다. “전체적으로 크기가 작아지면서 구조적 긴장이 약해지는 대신 아담한 느낌을 주며, 형태미보다 장식미가 두드러진다”고 주장한다.
매너리즘 현상이 일어날 때 한편에서는 장식 취미도 나타났다. 장식 취미는 형태가 완성된 다음에 의미나 아름다움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다.



(장항리 오층석탑)



(화엄사 서오층석탑)



(원원사 삼층석탑)

장식 취미는 장항리 오층석탑, 화엄사 서오층석탑을 시작으로 경주 원원사 삼층석탑의 사천왕상과 십이지신상,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의 사방불과 팔부신중상 및 천인상 등이다.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
.
특히 실상사 백장암삼층석탑에는 불보살, 신장, 주악천인, 난간, 연꽃무늬 등을 가득 새겨 장식탑의 극치를 보여준다.







(백장암 삼층석탑)



(서삼층석탑)

이러한 석탑 변천의 관점에서 볼 때 동탑은 높이가 3.76m, 서탑은 높이가 4.25m이다. 이는 탑의 크기가 축소된 신라하대의 형식이다. 동탑은 단층기단 위에 세운 삼층석탑으로 지붕돌의 층급받침이 1,2층은 넷이고 3층은 셋이다.



(서삼층석탑)

서탑은 이중기단을 가진 삼층석탑으로 지붕돌의 층급받침이 1,2층은 다섯, 3층은 넷이다. 서탑은 통일신라 중대의 양식이지만 동탑은 하대나 고려 초기의 양식이라는 의미다. 두 탑 모두가 1층 몸돌 각 면에 여래좌상이 양각되어 있다. 동탑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보륜이 남아 있고 서탑 상륜부에는 노반, 보주가 남아 있다.



(동삼층석탑. 1985)

따라서 두 탑의 형식과 수법은 서로 달라 한 쌍의 탑으로 볼 수 없을 만큼 조각과 모양이 다르다. 하지만 안정감과 비례감은 물론이고 상승감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탑들은 신라 헌안왕 3년(859) 도선국사가 조성했다는 설이 전해온다.


수도암의 유물들을 감상하고는 수도산 정상으로 향했다. 이곳이 해발 980m라 실제 올라야 하는 높이는 337m이다. 등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점(死點, dead point)을 잘 넘기는 것이다. 사점은 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숨이 차며 고통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이를 견디어 극복해내면 괴로움이 점차 누그러져 평안한 상태가 된다.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를 세컨드 윈드(Second wind)라고 한다.


이때 윈드(wind)는 바람이 아니고 호흡이다. 즉 두 번째 호흡인 Second wind가 나타나야 편하게 등산을 계속할 수 있다. 그래서 등산은 처음에는 천천히 가다가 사점이 오면 쉬었다 가야 가슴이 편안해진다.


잠깐 쉬는 동안 위쪽을 바라보자 연달래가 화려하게 피어있다. 올라갈수록 점입가경이다. 연달래 군락지를 만난 것이다. 산에서 만나는 꽃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꽃이 연달래다.


모양이나 색이 우아함 그 자체다. 봄이면 철쭉을 보기 위해 대운산을 시작으로 황매산, 지리산 바래봉을 거쳐 6월 초에는 소백산으로 철쭉 산행을 다녔다. 황매산과 바래봉은 산철쭉이 많다. 그러나 대운산과 소백산은 우아한 연분홍의 철쭉(연달래)이 주종을 이루어 이 두 산을 더 좋아했다. 그런데 수도산의 연달래는 소백산 철쭉이나 대운산 철쭉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다.


오늘은 가시거리도 좋아 가야산 상왕봉과 칠불봉이 뚜렷하게 구별되어 보인다. 전혀 힘이 들지 않게 무념무상으로 걸어간다. 등산로 옆에는 노랑제비꽃이 피어있다. 이는 멸종위기 식물 2급에 해당되는 식물로 높은 산이 아니면 보기 힘든 꽃이다. 노랑제비 옆에는 족도리풀도 함께 있다.



(족도리풀과 꽃)

친구들에게 숨어있는 족도리풀의 꽃을 보여주자 신기하게 여긴다.




정상 가까이 능선에는 아직도 피지 않은 연달래 군락지가 나왔다. 꽃이 피려면 일주일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일주일 후에 다시 와 화려한 연달래의 향연을 기대하면서 정상으로 나아갔다. 드디어 정상에 도달했다. 정상에는 아직 진달래가 반은 피고 반은 몽우리 상태로 남아 있다. 해발 1,317m인 이곳에는 아직도 3월 초순이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저절로 감탄사를 연발하게 만든다. 저 멀리 제법 뚜렷하게 지리산군들이 보인다. 천왕봉을 필두로 중봉과 제석봉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바로 앞에 덕유산군들이 펼쳐져 있다. 덕유산과 남덕유산이 바로 코앞에 서 있는 기분이다. 서북쪽으로는 민주지산과 덕유산을 잇는 삼봉산과 북동쪽으로는 팔공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날씨 맑고 가시거리 좋은 날에 높은 산의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즐거움이다. 조망의 즐거움을 친구들과 함께 느끼는 기분은 형용할 수 없는 기쁨으로 다가온다. 아쉬운 마음으로 다음을 기약하며 수도암으로 다시 내려왔다.
늦은 점심으로 가야산 근처 농가맛집밀에서 연밥 정식을 먹었다. 연밥 정식은 아직도 현역으로 잘 나가는 친구가 쏘았다. 이것으로 2023년 봄 산행을 마치고 여름 산행으로 고흥 팔영산으로 정하고는 헤어졌다.




※ 수도암 동·서 삼층석탑은 국보 제452호이었던 것을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97호로 격하해서 재지정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국보와 보물의 지정과 차이를 알아보자.

일제강점기에는 우리나라 문화재의 격하 정책으로 국보로 지정된 것은 없고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에 의하여 보물로만 지정되었다. 1955년 정부에 의하여 일제강점기에 지정된 보물을 모두 국보로 승격시켜 지정하였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 공포되었고, 1963년 국보와 보물로 나누어 재지정하면서 116점을 선정하여 국보로 지정하였다. 이때 수도암 동·서 삼층석탑도 보물로 격하된 것이다. 지정 번호는 가치의 높고 낮음을 표시한 것이 아니고 지정된 순서를 의미한다.


국보의 지정 대상은 목조 건물, 석조물, 전적(典籍), 서적, 고문서, 회화, 조각, 공예품, 고고자료, 무구(武具) 등으로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가 커서 보물로 지정될 만한 것 중에서 제작 연대가 오래되고, 그 시대를 대표하며, 제작의 의장이나 기술이 가장 뛰어나고, 형태·품질·용도가 특이하며, 역사적 인물과 관련이 깊거나 직접 만든 것 등이다.


국보와 보물의 차이점은 국보는 각 분류별로 보물의 가치가 있는 문화재 중에서 시대를 대표하거나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으뜸인 것을 지정한 것이다. 보물은 일반적인 보물 지정 기준에 합당한 문화재이기 때문에 같은 수준의 것들이 많으며, 지정 수량도 국보보다 많다.


한국에서는 건축물을 비롯한 유형 문화재 가운데 가치가 높은 문화 유산을 보물이라 하며, 이 보물 중에서 특히 역사적·학술적·예술적·기술적 가치가 크다고 인정 받은 유산을 문화재위원회에서 심사하여 별도로 국보로 지정한다.


2021년 11월 19일 부터 시행하는 개정안을 통해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라고 표현됐던 기정 기준에 대해 각 세부 평가요소를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역사적 가치’는 ‘시대성, 역사적 인물 및 사건 관련성, 문화사적 기여도 등’으로, ‘예술적 가치’는 ‘인류 또는 우리나라의 미적 가치 구현, 조형성, 독창성 등’으로, ‘학술적 가치’는 ‘작가 또는 유파의 대표성, 특이성, 명확성, 완전성, 연구기여도 등’으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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