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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행15-프라도 미술관 2
2023-08-10(목) 07:22:51, 51676
오늘날 벨기에와 네덜란드 지역에 해당하는 플랑드르 지역은 일찍부터 상업을 중심으로 하는 자치 도시들이 발달한 지역이다. 15~16세기 플랑드르파 회화의 대표작으로는 히에로니무스 보수(1450년경~1516)의 ‘쾌락의 정원(1500-05년)’과 브뤼헐의 ‘죽음의 승리(1562-63년)’가 전시되어 있다. 독일 출신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의 ‘자화상’, ‘아담’, ‘이브’가 있고 17세기의 플랑드르파 회화의 대표로 불리는 루벤스(1577~1640)의 ‘삼미신’, ‘사랑의 정원’, ‘농부들의 춤’, ‘레르마 공작의 기마상’ 등 수많은 걸작을 볼 수 있다.





(보스, 괘락의 정원)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쾌락의 정원’은 주제가 도덕적 교훈이다. 작품의 왼쪽에는 아담과 이브와 수많은 경이로운 동물을 담은 낙원을 묘사하고, 중간에 벌거벗은 사람들의 모습은 육체적 욕망이 인간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 됨을 보여 준다. 오른쪽에는 다양한 종류의 죄인들에게 공상의 징벌을 그린 지옥의 모습을 담았다.



(브뤼헐, 죽음의 승리)

피터르 브뤼헐(1525년경~1569)은 ‘죽음의 승리’에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당시 역병이 휩쓸고 간 유럽에서는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어찌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지도 모른 채 재앙을 견뎌내야 했다. 교회로 몰려가 살려달라고 기도는 하지만, 종교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무기력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지금은 에이즈나, 코로나 등 새로운 전염병이 나타나면 원인을 알 수 있어 시간이 지나면 치료 방법이 있지만 당시에는 죽음만이 답일 뿐이었다.



(뒤러, 자화상)

알브레히트 뒤러는 북유럽의 레오나르도라 불릴 만큼 소묘, 유화, 수채화, 판화 등 다양한 미술 장르뿐 아니라 인문적 소양과 자연 관찰 등 다방면에 지적 관심이 있었다. 뒤러는 종교화, 초상화, 풍경화 등 다양한 주제의 작품을 남겼다. 뒤러는 ‘독일 미술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경험한 선구적인 북유럽 미술가였다. 뒤러는 장인이기보다는 지식인이기를 원했던 최초의 미술가로 ‘르네상스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곳에 있는 그의 자화상(1468년)은 26세일 때 그렸다. 이 자화상에서 자신을 화가가 아닌 귀족으로 표현했다. 르네상스 시기엔 화가가 수공업자 위치에서 지식인 또는 궁정인 위치로 상승했었다. 뒤러는 여러 기술 서적의 저자이다. 그는 권력층 사이에서 인기 있는 유명 인사였다. 그래서 자화상의 창문 밑에 자신의 서명을 자랑스럽게 써넣었다.



(뒤러, 아담과 이브)

뒤러의 ‘아담’과 ‘이브’(1507)는 그가 베네치아로의 두 번째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 고향 뉘른베르크에서 그렸다. 이 그림은 해부학적 인체 묘사로 당대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다.



(뒤러, 이브)

이브가 든 나뭇가지에 달린 조그마한 명판에 ‘알브레히트 뒤러가 1507년에 완성했다’란 서명이 있다.



(루벤ㅅ, 파리스의 심판)

17세기의 플랑드르파로 ‘삼미신’, ‘사랑의 정원’, ‘농부들의 춤’, ‘레르마 공작의 기마상’ 등 수많은 걸작를 남긴 루벤스(1577~1640)는 독일의 쾰른 근처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플랑드르에 속했다. 루벤스는 화가 겸 학자이자 외교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1620년대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고향인 안트베르펜에서 대규모의 공방을 운영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그가 스페인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덕에 프라도 미술관이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루벤스의 그림을 지니게 되었다. 루벤스는 벨라스케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말년에 그린 풍경화는 인상주의 화가를 비롯한 후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루벤ㅅ, 삼미신)

‘삼미신’은 아글라에아(광휘), 에우프로시네(기쁨), 탈리아(개화)라는 세 여인이다. 제우스의 연인에게서 태어난 딸들이다. 원형적인 리듬이나 우아한 곡선들은 루벤스 말년 화풍의 특징이다. 이는 그의 두 번째 결혼이 가져다준 관능적 영감과 만족감의 결과라고 평가된다. 왼쪽의 여인은 37살 연하인 루벤스의 두 번째 부인 엘렌 프르망에게서 직접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루벤스가 죽을 때까지 이 그림을 가지고 있다가 그의 사망 후 펠리페 4세의 소장품이 되었다.



(루벤ㅅ, 사랑의 정원)

루벤스의 ‘사랑의 정원’은 그가 사랑했던 여인들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는 1630년인 54세 때 16살의 엘렌 푸르망을 아내로 맞았다. 풍만하고 매력적인 육체와 긴 금발을 지닌 엘렌은 루벤스의 회화에 자주 그려졌다. 루벤스는 ‘사랑의 정원’을 통해 열광적이고 풍부한 사랑과 행복을 표현했다. 이 그림 또한 루벤스가 말년에 행복감을 만끽하던 시절에 그린 것이다. 그림의 배경은 안트베르펜에 있는 자신의 정원이다.
루벤스는 바로크 양식의 화가이다. 바로크는 포르투갈어의 ‘비뚤어진 진주’라는 뜻으로 1600~1750년 사이의 유럽 미술양식을 말한다. 르네상스의 단정하고 우아한 고전양식에 비하여 장식이 지나치고 과장된 건축과 조각에 대한 경멸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르네상스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팽창하는 17세기 유럽의 시대정신에 발맞추어 외향적이고 격동적이며 회화에서는 격렬한 명암대비와 풍요로운 경향으로 쓰인다.



(안 브뤼겔과 루벤스의 후각)

바로크 회화의 창시자는 17세기 초 이탈리아의 카라바조(1571~1610)이다. 그의 영향은 곧 스페인과 북유럽으로 퍼져 그의 추종자를 ‘카라바 제스키’라 불렀다. 특히 루벤스,렘브란트를 낳은 플랑드르와 네덜란드는 바로크의 중심지가 되었다. 스페인에서는 벨라스케스, 무리요 등이 활동하였다. 바로크 양식은 건축, 음악, 미술, 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나타난다. 건축에 있어서는 베르사유 궁전 같은 절대 군주의 궁정을 중심으로 바로크 양식이 유행하였다.



(카라바조, 골리앗을 이긴 다윗)

프라도에는 카라바조의 ‘골리앗을 이긴 다윗(1600년경)’이 있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이스라엘과 필리스티아 간의 전쟁사에 나온다. 블레셋 장수 골리앗의 이마에 돌팔매를 명중시켜 죽였다는, 구약성서 《사무엘서》 상 17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카라바조는 다윗과 골리앗의 모습만을 어둠 속에 두드러지도록 그려놓았다. 이 그림의 특징은 골리앗의 얼굴, 다윗의 얼굴 모두 화가 자신의 초상이라는 점이다. 화가가 성서 역사화에 자신의 초상을 그려 넣는 것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인데, 골리앗의 얼굴뿐만 아니라 젊은 다윗의 얼굴도 화가 자신의 젊을 때의 모습을 그려 이 작품은 일종의 이중 자화상이다. 방금 자른 골리앗의 목을 들고 있는 다윗의 표정과 목이 잘린 골리앗의 표정이 사뭇 다르다. 패자인 골리앗은 지칠 대로 지친 표정으로 이제 다 끝나서 후련하다는 느낌을 주는 반면, 승리자인 다윗은 뭔가 씁쓸하고 불안한 표정으로 잘린 골리앗을 바라보고 있다.



(엘 그레코, 목동들의 경배)

프라도 미술관이 세계 3대 미술관으로 평가 받는 데에는 엘 그레코와 벨라스케스, 고야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크레타섬 출신의 엘 그레코는 16세기 르네상스 회화의 중심이었던 베네치아와 로마를 거쳐 스페인의 톨레도에 정착했다. 그는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라는 본명 대신 ‘그리스인’이란 뜻의 별칭인 ‘엘 그레코’로 불렸다. 엘 그레코는 유서 깊은 톨레도에서 당시 큰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미술사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아주 늦었다. 지금의 엘 그레코는 틴토레토의 매너리즘 양식에서 영향을 받아 바로크 미술의 격정적인 표현을 예시한 독특한 화풍의 소유자로 평가받지만, 당시 이탈리아 고전주의의 세련된 전통을 계승한 유파들에게 인정받기는 쉽지 않았다.



(엘 그레코, 세례요한)

19세기 중반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그를 재발견한 사람은 현대미술의 가장 혁신적인 작가들로 평가받는 마네와 세잔 같은 이들이었다. 엘 그레코의 중요한 작품들은 종교적 주제에 치중되어 있지만 인물화와 풍경화에서 보인 개성적인 표현은 현대 화가들에게는 대단한 매력이었다. 해부학적 정확성을 벗어나 길게 늘어뜨린 인물의 형상은 이탈리아 매너리즘 화풍을 더욱 과장한 것 같았다. 색채는 장식적인 사용이 두드러져 중세의 성물 공예를 연상시켰다. 붓놀림은 세련미와는 다른 방향에서 소묘적 특징을 보여주는데 즉흥적인 듯 자유롭고 역동적이다. 원근감과 회화적 환영을 중시하는 정통 르네상스 그림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이단적이다. 엘 그레코의 특징들은 개성적인 창작으로 나아가려 한 현대의 아방가르드 작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이러한 엘 그레코를 ‘가장 순수한 스페인의 혼을 표현한 화가’로 평가한다.



(엘 그레코, 수태고지)

이곳에는 엘 그레코의 작품 중 ‘성 삼위일체’, ‘수태고지’ 등 모두 39점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슴에 손을 얹은 기사의 초상’은 엘 그레코의 작품 가운데 최고의 수작으로 꼽힌다.



(엘 그레코, 가슴에 손을 얹은 기사의 초상)

엘 그레코를 비방하던 사람들까지도 그의 초상화는 훌륭하다고 인정해 주었다. 엘 그레코가 스페인 초상화의 전통이었던 간소함, 무관심한 표정, 정밀 묘사 등을 베네치아 화풍과 적절하게 접합시킨 덕분이다. 이후로 초상화의 전형이 되었다.



(엘 그레코, 삼위일체)

‘삼위일체’는 톨레도에 있는 산토 도밍고 엘 안구오 수도원의 중앙제단화이다. 삼위일체에는 성부 하느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느님이 그려져 있다. 가운데 누워있는 분이 예수님, 예수를 붙들고 있는 분이 성부 하느님, 그리고 비둘기는 성령을 상징한다. 그런데 당시 일부 주교들은 이 그림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성부 하나님의 모자가 로마 가톨릭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 정교회 수장의 모자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부분은 없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따뜻하고 절실한 감정을 더 강조하고 있다. 색상은 베네치아풍이지만, 우락부락한 근육은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아름다운 몸과 다정다감한 표정은 그림의 느낌을 잔잔하게 만든다.



(벨라스커스, 시녀들)

미술관 2층 정중앙 방 한가운데에는 항상 관람객이 분비는 작품이 있다. 벨라스케스의 대표작인 ‘라스 메니나스(시녀들)’다. 1980년대 영국 잡지의 설문 조사 에서 서양 회화 역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된 작품이기도 하다. 벨라스케스의 초상화는 매우 사실적이고 대상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이 특징적이다. 이 작품은 벨라스케스의 화실을 방문한 펠리페 4세의 딸인 5살 마르가리타와 시녀들을 그린 초상화로, 작품 속 등장인물은 총 11명이다.


화면의 뒤편에는 마리아나 왕비와 국왕 펠리페 4세가 거울 속에 비친다. 열려 있는 문 앞에 시종이 계단 위에 서 있다. 서로 다른 신분의 사람들의 표정이나 외향적인 특징을 상세하게 묘사하면서,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벨라스케스의 대표적인 표현 기법이다. 특히 ‘거울’과 ‘열린 문’이란 소재를 이용해 그림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확장시켰음을 알 수 있다. 멀리 떨어진 거울 속에는 왕과 왕비의 모습과 열린 문에 역광을 받고 서 있는 시종의 모습은 그림 밖인 관람객 위치에 있음을 보여 준다. 이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조화롭게 잘 배치된 가운데 그림 바깥까지 확장해 깊이와 거리감을 느끼게 해준다.
이 작품은 작가가 선원근법(투시 원근법, 소실점을 사용하여 3차원의 공간 및 대상을 평면 위에 표현하는 방법)과 대기 원근법(명암, 채도 등 색채의 조절을 통해 공간의 깊이나 거리감을 평면 위에 나타내는 방법으로, 공기원근법·색채원근법이라고도 한다)에 통달하여 원숙한 명암 처리로 사람들 사이사이에 공기가 통할 것 같은 공간감을 준다.


화면 왼편에 자리 잡은 벨라스케스의 자화상은 캔버스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전형적인 화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자신을 노출시켜 예술의 숭고한 의미와 회화의 상징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그림 속 그가 입고 있는 옷에 산티아고 기사단의 상징인 붉은 십자가를 가슴에 달고 있는 것은 그가 고귀한 귀족 신분임을 나타낸다. 이 그림을 그린 3년 후에 벨라스케스는 실제로 기사단의 일원이 되어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 벨라스케스는 1599년 스페인의 하급 귀족 출신의 어머니와 포르투갈계 유대인 변호사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스페인은 부모의 성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는 문서나 작품에 어머니 성인 ‘벨라스케스’로 서명했다. 그는 평생에 걸쳐 귀족이 되기를 소원하여 결국 귀족이 되었다.


이 그림은 ‘회화의 신학’으로까지 평가받았다. 모네, 마네, 드가, 고야, 달리, 피카소 등이 재해석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예술가뿐 아니라 비평가, 기호학, 구조주의, 정신분석학, 탈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등에서 다양한 해석과 논쟁을 낳기도 했다.



(벨라스케스, 헤파이토스의 대장간)



(벨라스케스 자화상)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바로크를 대표하는 거장이지만, 환상적이거나 극적이기보다는 차분하고 엄숙한 사실주의적 화풍에 기초하여 성서적 주제를 현실적인 일상의 장면으로 표현했다. 그는 인물의 내면을 꿰뚫는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무리요, 묵주의 성모)

17세기의 스페인 회화로 벨라스케스 외에도 무리요의 작품들이 프라도에 많이 있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엘 그레코의 동상은 없다. 그런데 무리요의 동상은 벨라스케스, 고야와 함께 있다.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1617~1682)는 17세기 후반의 스페인 최성기 바로크 회화를 벨라스케스와 함께 대표하는 화가이다. 그는 세비야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사망했다. 스페인 독립전쟁 때에 그의 작품은 프랑스 장군들의 주요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명성은 낭만주의 시대에 정점에 이르렀다. 미묘한 명암과 우아한 형태, 따사로운 색조 속에 자애와 경건함이 가득한 감미로운 그림으로 그는 ‘에스파냐의 라파엘로’라고까지 불리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너무 종교적이고 감미롭고 감상적이라는 이유로 급속히 평가절하되었으나 1980년대에 데생, 색채, 구도가 훌륭하다는 재평가를 받는다.
이곳에는 ‘작은새와 성 가족’, ‘묵주의 성모’ 등이 있다. ‘작은새와 성 가족’은 성 가족의 일상을 보여주고 있다.



(무리요, 작은새와 성가족)

털실 감기에 바쁜 성모는 성 요셉이 붙들고 있는 아들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무리요는 이 작품에서 요셉에게 중점을 두고 있다. 16세기 이전에는 거의 존재감이 없던 성 요셉은 16세기 말부터 관대함, 헌신, 신중함의 표본으로 경외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이 그림은 전체가 가정생활과 일에 대한 사랑을 찬양하고 있다. 이는 성모의 일감 바구니나 성 요셉의 목공 가구들의 뛰어난 정물 묘사를 통해 드러난다.
무리요의 ‘묵주의 성모’는 주문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반복해서 여러 장을 그려야 했다. 특히 성모의 피부색과 아기 예수의 발가벗은 몸을 강조한다. 둘은 껴안은 상태에서 서로를 엮고 있는 묵주를 거머쥔 채 관객들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묵주는 당시의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물건이었다. 이는 아들과의 중개자 역할을 한 마리아의 위치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스페인 회화의 최고 보물 중 하나인 고야의 작품들은 2~3층에 전시되어 있다. 특히 전시 면적이 작은 3층은 고야의 전용 전시실이나 마찬가지다.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1746~1828)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이자 판화가이다. 그는 1746년 스페인 아라곤 지방의 벽촌인 푸엔데토도스 마을에서 도금공의 아들로 태어나, 몰락 귀족의 딸인 그라시아 루시엔테스와 결혼했다.



(고야, 파라솔)

고야는 1776년경 엘 파르도의 궁전 식당을 장식할 태피스트리 밑그림을 주문받았다. 밑그림 중 ‘파라솔(1777년)’은 ‘마호(Majo; 남자 멋쟁이)’와 ‘마하(Maja; 여자 멋쟁이)’라는 인물을 도입했다. 이런 유형의 남녀들은 대개 하인이나 영세업자로 일하는 사람들이지만 이국적인 옷차림과 자유분방한 행동으로 귀족들마저 이들의 유행을 따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풍성한 노란 스커트와 몸에 꼭 맞는 하늘색 상의 그리고 흰 망토를 걸치고 풀밭에 앉아있는 마하는 인형처럼 예쁘장하다. 파라솔이 마하에게 작은 그늘을 드리워주고 있지만, 노란 스커트에 반사된 빛이 마하의 얼굴을 은은하게 밝혀준다. 입가에 요염한 미소를 띠고 관람자를 빤히 바라보는 마하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당돌한 매력을 뽐내고 있다.



(고야, 십자가의 그리스도)

고야는 1780년 왕립 산페르난도 미술 아카데미의 입회를 위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출품하여 만장일치로 입회가 허락되었다. 어두운 배경 위에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는 이 그림은 스페인의 바로크식 전통에 따른 것으로, 고전적 조화로움과 이상적인 미의 표현 방식이 돋보인다.



(고야, 가스파르 멜초르 데 호베야노스의 초상)

고야는 초상화를 통해 당대의 개화된 엘리트들과 교분을 쌓았다. 카를로스 4세의 법무장관인 ‘가스파르 멜초르 데 호베야노스의 초상(1798년)’은 고결하고 애국심이 강한 인물을 손으로 머리를 떠받치고 있는 시름에 겨운 사색가로 표현하였다. 고야는 왕국의 실력자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인간의 나약함을 엿보이게 하였다. 고야의 모델들은 대부분 고야와 절친한 친구가 되거나 후원자가 되었다. 호베야노스와 돈 루이스 왕자, 알바 공작부인과 오수나 공작부부가 그 예이다. 고야가 1786년 궁정화가로 임명된 것은 이런 초상화 고객들 덕분이었다.



(고야, 69세 때 그린 자화상)

1789년 카를로스 4세가 즉위하자 고야는 수석 궁정화가로 임명된다. 고야는 사회적 지위가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위기를 두 번 맞게 된다. 첫 번째는 개인적인 위기로 1793년 중병으로 귀머거리가 되었다. 이 병으로 비판적이었던 그의 성향을 더 비판적으로 변하게 했다.



(고야, 카를로스 4세의 가족)

고야가 궁정 수석화가로 있을 무렵인 1800년대 초에 ‘알바 공작’으로부터 자기 부인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그런데 아름다운 공작부인을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리던 고야는 그만 그 공작부인과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녀는 스페인 귀족 중에서도 명문 중의 명문 가문 출신이었다.



(고야, 옷 벋은 마하)

알바 공작 부인은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야를 사랑했다. ‘털끝 하나까지도 관능으로 충만’ 된 알바 공작 부인과 ‘걸어 다니는 상남자’라는 별명을 가진 고야의 사랑은 스페인 전체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알바 공작 부인은 고야와의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식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공작 부인이 관계를 정리하고 돌아선 것이다. 사랑했던 알바 공작 부인의 배신으로 고야는 거의 이성을 잃을 정도로 상심했다. 그녀에 대한 사랑의 상처는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결국 고야는 공작부인의 벗은 모습을 그리게 된다. 알바 공작을 위해서 ‘옷 입은 마하’를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는 ‘옷 벗은 마하’를 그렸다고 한다.



(고야, 옷 입은 마하)

그러나 여기에는 다양한 설이 있다. 1795년부터 고야의 후원자가 된 고도이 수상이 주문했을 확률이 큰 ‘옷 벗은 마하’는 종교 재판소에서 누드화를 금지하던 시기에 그려진 고야의 유일한 누드화이다. 이 그림은 티치아노의 누드화로 추정되는 다른 누드화와 벨라스케스가 그린 유일한 누드화인 ‘거울을 보는 비너스’와 함께 고도이의 궁전 안 은밀히 숨겨진 방에 걸려 있었다. 이들은 알바 여공작이 고도이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벨라스케스, 거울을 보는 비너스)



(옷 벋은 마하)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모델의 주인공은 알바 공작 부인이라는 설과 카를로스 4세의 애첩이자 고도이의 애인이자 부인인 폐피타투도라는 설이 공존하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아주 현대적인 누드화이다. 아무런 은유나 풍자 없이 적나라하게 자신의 몸을 관객에게 노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옷 입은 마하’는 ‘옷 벗은 마하’ 이후에 그려졌다. 이 두 그림이 세상에 밝혀진 것은 1808년 고도이의 재산 정리 과정에서 나온 재산 목록 때문이다.


마하가 입고 있는 옷의 분홍색 허리띠나 술이 달린 짧은 재킷 등은 당시 마드리드의 마하들 사이에 유행하던 패션이다. 이 그림의 명칭은 거기서 유래했다. 이 두 그림은 아랑후에스 폭동 후, 1808년 고도이가 실각하면서 압수된 것이다. 1815년의 종교 재판에서 고야가 이 그림들을 누구를 위해, 무슨 이유로 그렸는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고야,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혹은 총살)

고야의 두 번째 위기는 스페인의 독립전쟁(1808~1814)이었다. 처음에 그는 계몽주의자 친구들과 함께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정부를 지지했다. 고립된 절대 왕정을 유지하던 스페인에 나폴레옹 정부는 프랑스 혁명의 진보적 사상과 합리적이고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갖고 오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의 잔인함과 참혹함에 고야는 무척 실망했다. 그 참혹함은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 혹은 맘루크와의 전투’와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혹은 총살’에 잘 나타나 있다.



(고야,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 혹은 맘루크와의 전투)

프랑스군이 물러나고 페르난도 7세가 복귀하면서 많은 궁정 직원들이 숙청을 당하지만, 고야는 무사히 그의 직위를 지켰다. 하지만 1816년에 젊은 화가 세센테 로페스에게 밀려나고, 그의 친구들도 친프랑스 혐의나 진보파 혐의로 감옥으로 가는 마드리드의 현실에 점점 더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아주 가까운 친구들만 만나고 나머지 시간은 혼자 틀어박혀 동판화 제작에 전념했다.



(고야, 두 노인의 식사)

1819년 고야는 “퀸타 델 소르도(Quinta del Sordo, 귀머거리의 집)”로 알려진 집을 샀다. 마드리드 외곽에 있는 집으로 농사도 지을 땅이 있는 시골집이었다. 이 집은 만사나레스 강가의 전망 좋은 언덕 위에 있었다. 고야는 1층과 2층에 있는 거실의 벽을 거대한 벽화들로 장식하였다. 엑스레이 연구 결과 원래 그 벽은 근처의 밝은 경치 같은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벽화 위에 고야는 오늘날 ‘검은 그림’으로 알려진 상징적인 그림들을 덧칠했다. 이 그림들은 주로 악행, 공포, 무지함과 죽음 같은 주제를 표현한다.



(고야,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이 검은 그림의 대표작은 ‘사투르누스(1820-23년)’다. 전설에 따르면 사투르누스는 어머니인 대지의 여신으로부터 자식들에게 지배권을 빼앗길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 이에 사투르누스는 그의 자식들을 차례로 잡아먹었다고 한다. 고야의 그림은 사투르누스가 아들을 잡아 먹고 있는 순간을 포착한 듯한 느낌을 준다. 고야의 이러한 그림은 이후에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양식의 유행을 태동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23년 70대 후반의 나이로 고야는 마드리드를 떠나 프랑스 보르도 지방으로 이주할 것을 결심하고는 이 집을 손자 마리아노에게 선물한다.



(1826년 80세 고야의 자화상)

1824년 프랑스의 보르도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4년을 살다가 1828년에 8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는 보르도의 샤르트뢰즈 묘지에 묻혔다. 고야의 유해는 1901년 보르도 묘지에서 스페인으로 돌아와 그가 1798년에 장식한 산 안토니오 데 라 플로리다 교회에 다시 매장되었다.
고야는 약 60년 동안 화가로 활동하면서 로코코부터 낭만주의에 이르는 다양한 양식적 변화를 보여주는 회화 7백여 점, 드로잉 9백여 점, 판화 3백여 점을 남겼다. 후세의 화가들, 특히 에두아르 마네와 파블로 피카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피카소, 게르니카)

프라도 미술관에서 진한 예술의 단비를 듬뿍 맞으며 스페인 여행을 마무리했다. 다시 간다면 피카소의 게르니카도 보고, 톨레도에서 한 달 살기도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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