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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행 14 - 프라도 미술관 1
2023-07-25(화) 08:52:01, 49114
일찍 일어나 마요르 광장 근처에서 내려 프라도 미술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른 시간에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다. 가는 방향이 대부분 같다. 그 끝자리에 프라도 미술관이 나왔다. ‘프라도’라는 단어는 스페인어로 ‘목초지’로 이 곳의 지명에서 유래한다.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가는 이유를 프라도 미술관 앞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아침부터 미술관을 관람하기 위해 기다리는 줄은 매우 길었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문이 3개 있는데 각각의 문에는 고야, 벨라스케스, 무리요의 동상이 입장하는 관람객을 맞이하듯이 서 있다. 가이드는 이 문들 앞을 지나 마지막 문 앞 가장 짧은 줄에 섰다. 그래도 30분 정도 줄을 선 뒤에야 미술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고야 동상)

프라도 미술관은 1785년 카를로스 3세 때에 자연 역사와 과학 연구원으로 쓰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었지만 왕립회화관 본부로 변신했다. 1819년 11월 19일에 왕립 회화미술관이란 이름으로 대중에게 문을 연 것이 오늘날의 프라도 미술관이다. 당시 국왕 페르난도 7세가 추진하고 후원한 결과였다.



(고야 동상)

1793년 파리에서 루브르 박물관이 개관하였다. 이는 유럽 최초의 대중 박물관이다. 루브르 박물관은 프랑스 대혁명이 한참일 때 국유화한 황실의 소장품들과 교회와 귀족들로부터 탈취한 작품들을 모은 것이 시초이다. 하지만 프라도 미술관의 작품들은 대부분 스페인 왕실의 소장품이다. 프라도 미술관은 15세기부터 스페인을 다스려 온 왕가의 특별한 취향과 미술품 수집에 대한 열정, 그리고 예술에 대한 사랑으로 태어난 곳이다. 스페인 역사상 최악의 왕으로 평가받고 있는 페르난도 7세는 지금의 프라도 미술관이 있게 한 가장 큰 공로자이다.



(무리요 동상)

프라도가 처음 문을 열었을 때 311개의 작품을 전시하였다. 대부분은 스페인 화가의 작품들이었다. 소장품은 페르난도 7세의 요청으로 많은 궁전의 작품들이 프라도 미술관으로 모이면서, 8년 뒤인 1827년 4,000여 개의 회화 작품으로 늘어났다. 이뿐만 아니라 미술관 운영에 쓰이는 모든 경비를 왕실에서 부담하였다.



(페르난도 7세)

페르난도 7세는 정치적으로는 우유부단하고, 자기 유전자의 전달에 대한 애착이 너무 강해 최악의 왕으로 평가받지만, 프라도 미술관 하나만으로도 모든 걸 용서해 주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에 대한 평가는 매우 주관적이다.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정반대로 평가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벨라스케스 동상)

프라도 미술관은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프라도 미술관은 고대 그리스 건축양식의 장점을 건물에 응용했다. 고대 그리스 건축 3대 양식인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양식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이다. 프라도 미술관 현관은 신전을 연상케 하는 도리아 양식, 북쪽 출입구와 전시실은 우아한 분위기의 이오니아 양식, 남쪽 정면의 발코니는 전통적인 코린트 양식으로 꾸며져 있다.



(미술관 현관)

“프라도를 보는 것으로 스페인 여행의 반은 끝났다”라고 말할 정도로 ‘오직 프라도만 보기 위해 스페인에 오는 분들도 많다’라고 가이드는 프라도 미술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프라도 미술관)

프라도 미술관이 유명한 가장 큰 이유는 스페인 3대 화가로 손꼽히는 엘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의 명작들이 있기 때문이다. 3대 화가의 작품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회화 컬렉션과 플랑드르 회화 컬렉션 등 빼놓을 수 없는 명작들이 많다. 이들 명작들 중 시대순으로 이탈리아, 플랑드르, 스페인의 회화순서로 감상하고자 한다.



(루벤스, 삼미신)

이곳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된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회화로는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1425-26년경)’와 보티첼리의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의 향연(1483)’과 르네상스의 주역 라파엘로의 ‘추기경(1510-11년)’등 종교화의 대작들이 있다. 그리고 작가불명의 모나리자(1503-19)가 이곳에 있다. 또한 이탈리아 회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베네치아의 티치아노 작품이 이곳에 여러 점이 있다.



(안젤리코, 수태고지)

프라 안젤리코(1387~1455)는 1420년경 도미니크회의 수도사로 서품을 받고 피렌체에서 활동한 세밀화가이며 제단화가였다. 피렌체 근처에 있는 성 도미니크 수도원의 제단 장식화로 ‘수태고지’를 그렸다.


이 그림의 왼쪽에는 아담과 이브가 짙은 녹색 정원을 배경으로 걷는 장면이, 오른쪽에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호화로운 주량 현관에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했음을 알리는 장면이 그려졌다. 제단을 바치는 대에는 마리아의 생애가 그려져 있다. 프라 안젤리코는 이탈리아의 고딕 말기 양식이었던 금박을 사용했다. 세세한 정밀 묘사뿐 아니라 건축 공간을 활용하는 르네상스 양식도 같이 사용하였다.


보티첼리의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의 향연(1483)’은 산드로 보티첼리와 협력자들이 함께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카치오의 대표작 ‘데카메론’을 이해해야 한다. ‘데카메론’의 총 100편의 이야기 가운데 다섯째 날 여덟 번째 이야기인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은 보티첼리는 총 4개의 그림으로 제작하였다. 4개의 시리즈로 연결되는 이 작품은 피렌체의 대부호인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가 의뢰하였다. 로렌초는 이 작품을 피렌체의 신흥귀족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푸치 가문의 아들 결혼식 선물로 주문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작품은 신혼부부의 방에 장식된 네 개의 그림 중 세 개의 그림이다.


당시 귀족들 사이에서는 사회적 지위와 가문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정략결혼이 성행했다. 이 작품에도 세 번째와 네 번째 그림 속의 숲속 나무 기둥과 결혼식이 거행되는 회랑 기둥에 메디치 가문과 푸치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이 그려져 있다. 이는 그림을 주문한 의뢰인과 선물 받은 두 가문의 사람들을 작품 속에 등장시켜 화합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의 기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라베나의 젊은 청년인 나스타조는 파올로 트라베르사리의 딸에게 구혼을 했다가 거절당하고 상심해서 교외로 나가 소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첫번째 그림)

첫 그림은 나스타조가 소나무 숲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는 장면이다. 한 여인을 개들이 공격하고 그 뒤를 말 탄 기수가 쫓는다. 기수는 귀도델리 아나스타지로 나스타조처럼 구혼을 냉정하게 거절당한 후 자살했었다. 그와 그의 연인은 그 벌로 오랜 세월 동안 금요일마다 같은 소나무 숲에서 이 끔찍한 상황을 되풀이하는 중이었다.



(두 번째 그림)

두 번째 그림은, 청년 기수는 개에게 쫓기는 연인을 잡아 칼로 등을 갈라 심장을 뽑아내어 굶주린 개들에게 던져주는 장면이다.



(세 번째 그림)

세 번째 그림은, 백마를 탄 기사의 기구한 사연을 들은 나스타조가 자신의 사랑을 거절했던 여인 파올라와 그 가문의 사람들을 초청하여 끔찍한 광경이 벌어지는 숲 근처에서 잔치를 벌이는 장면이다. 한창 즐거움에 취해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무서운 장면을 목격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또한 기사의 슬픈 사연을 들은 파울라는 비로소 나스타조의 진심을 헤아리고 그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네 번째 그림)

네 번째 그림은 나스타조와 파올라의 성대한 결혼식 장면이다. 결혼식 뒤편 배경으로는 개선문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과의 결혼에 성공한 나스타조의 승리를 담아내고 있다.
인연을 저버린 연인은 끔찍한 형벌을 받게 되고 인연을 맺은 연인은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는 이 그림 속 이야기는 사랑하는 여인을 쟁취하고 싶은 한 남자가 가진 욕망의 잔혹함을 화가의 붓을 통해 정당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보티첼리는 비너스의 탄생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신화의 내용과 문학의 이야기를 차용하고 있다. 그의 그림에 대한 해석은 아직도 논란의 대상으로 남아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 그림들은 300년 동안 푸치 가문이 소장하던 그림들이었다. 현재 이곳 프라도 미술관에 세 개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고 마지막 네 번째 그림은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비너스의 탄생)

보티첼리(1445 ?~1510)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로 자연 연구와 미묘한 곡선과 감상적인 시정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신비적인 경향을 보인다. ‘비너스의 탄생(1485)’은 하늘의 신 우라노스의 딸인 비너스가 바다에서 태어나고 있는 장면을 묘사 했다. 비너스는 미와 사랑의 신으로 아름다움과 사랑, 행복이 하나임을 의미한다. 보티첼리의 최대걸작으로 오늘날까지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회화로 꼽힌다.


그러나 1498년 피렌체에 있는 산 마르코 수도원 부원장이었던 사보나롤라(1452~1498)가 이단으로 몰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 의해 파문당해 화형에 처해지자 보티첼리는 그의 추종자로서 신비적 환상으로 가득 찬 작품을 그렸다. 1504년 미켈란젤로의 다윗상의 설치장소를 심의하는 위원회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과 함께 출석한 후 그는 제작 활동을 거의 중단하고 소식마저 끊었다.



(라파엘로 추기경)

라파엘로의 ‘추기경’의 주인공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신비에 쌓인 모델은 르네상스 시대 고위성직자의 이상형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 추기경의 자세나 불가사의한 표정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연상시킨다. 짙은 녹색 배경과 과감한 대조를 이루는 붉은색의 망토와 금빛 소매, 부조처럼 뚜렷한 얼굴과 정교한 붓 터치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이탈리아의 추기경이자 인문학자였던 피에트로 벰보(1470-1547)가 말하기를 라파엘로는 인물화를 ‘실제 인물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린다’라고 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추기경’과 1506년에 그린 라파엘로의 ‘자화상’이 관상학으로는 매우 닮아 있다. 어쩌면 자신의 미래 이상향을 그린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라파엘로 자화상)

라파엘로(1483~1520)는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궁정화가 조반니 산티의 아들로 태어난 라파엘로는 특유의 부드럽고 우아한 화풍으로 완벽한 고전적 균형과 조화를 이룬 작품 세계를 보여 주는 미술가이다. 그의 개성을 뚜렸하게 볼 수 있는 작품인 ‘대공의 성모(1505)’ 에서 우아한 이상미를 친근하고 편안한 분위기로 드러내고 있다.



(라파엘로 대공의 성모)

그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인체 해부학에 대한 지식을 배웠다. 그리고 레오나르도로부터는 간결한 피라미드 구조와 효과적인 빛의 사용, 친밀감, 부드러운 색조 변화로 형태에 입체감을 주는 스푸마토 기법 등을 익혔다. 이를 통해 라파엘로는 호소력 짙은 고요하고 평온한 작품을 창안해낼 수 있었다. 1508년에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간 라파엘로는 교황의 화가로서 눈부신 활동을 시작했다. 그에게 큰 성공을 가져다준 작품은 바티칸 교황청의 방들에 그린 프레스코들이다.







(아테네 학당)

그중 하나인 ‘아테네 학당(1510-1512경)’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을 백과사전처럼 나열하고 있다. 이는 명쾌한 구도 속에 인물들을 분야와 성격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무리 지어 배열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라파엘로는 이야기와 구성을 최상으로 표현해 그의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세간의 평에 의하면 그는 ‘많은 여인들을 사랑하여 연애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할 정도로 연애에 몰두했다. 라파엘로는 서른 일곱의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지만, 매우 존경받는 인물로 판테온에 묻혔다.



(프라도 모나리자)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

작가 불명의 모나리자(1503-19년)는 2011년까지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그동안 쌓인 검은 먼지가 그림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술적 분석에 의한 결과 프라도의 모나리자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같은 공방에서 동시에 그려진 그림임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곳 모나리자의 작풍은 외곽선을 더 뚜렷하게 그린 것이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 유명한 스푸마토 기법과는 다르다. 스푸마토 기법이란 회화에서 색깔과 색깔 사이의 경계선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부드럽게 하는 음영법이다. 따라서 레오나르도 다빈치 제자의 그림으로 추정한다. 이 그림은 호두나무 위에 청금석과 붉은 옻칠 같은 귀한 재료로 아주 정성스럽게 만든 걸로 미루어 보아 공방에서 연습용으로 제작한 그림이 아닌 진본으로 평가받는다. 나의 눈에는 원본보다 더 깨끗하고, 젊고 예쁘게 보여 이곳에 있는 모나리자가 한 수 더 위인 것처럼 보인다.





(고야, 옷을 입은 마하, 옷을 벗은 마하)

세계 미술 역사상 한 작가를 가장 충실하고 적극적으로 후원한 왕가는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였다. 합스부르크는 티치아노를 40년 이상 후원한 고객이었다. 티치아노의 화풍이 스페인 왕가가 지향하는 표현 방식이나 이상에 완벽하게 부합하기 때문이다. 티치아노는 카를 5세나 펠리페 2세의 정치적, 이념적, 종교적 이상에 맞춰 그림을 그릴 줄 알았기 때문이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티치아노의 ‘뮐베르크의 카를 5세’, ‘오르간 연주자와 비너스’,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 ‘자화상’ 등이 있다.



(티치아노, 뮐베르크의 카를 5세)

‘뮐베르크의 카를 5세(1548년)’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초상화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1547년 4월 24일 뮐베르크 전투에서 개신교 동맹군을 물리친 승전 기념화이다. 작가는 이 기마상에서 고대 로마 전통의 도상과 기독교 기사도의 도상을 혼합했다. 비록 말은 앞발을 치켜들고 있어 공격적으로 보이지만, 카를 5세의 평안한 표정은 황제의 통치 능력과 여러 평화 조약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그의 평정심을 암시한다. 황제를 신교도와 싸우는 기독교 기사로 묘사한 이 작품은 사실적 표현과 상징적 표현이 균형 있게 배치되어 초상화의 정수로 남아 있다.



(티치아노, 오르간 연주자와 비너스)

‘오르간 연주자와 비너스(1550년경)’는 비스듬히 누운 그녀의 잔잔한 아름다움이 순진한 개의 장난으로 살짝 방해를 받고 있다. 진홍색 침대와 붉은 커튼 속에 그녀의 풍만한 육체가 두드러진다. 옷을 입고 검까지 찬 오르간 연주자가 뻔뻔스럽게 비너스를 쳐다보는 장면은 이 그림을 더 에로틱하게 만든다. 정원을 거니는 커플과 사슴을 뒤쫓는 개, 분수대 위에 앉은 공작이 선정적 분위기를 더해준다.



(티치아노, 천상과 세속의 사랑)

이 그림의 의미에 대해서 단순히 에로틱한 표현이라는 평가와 신플라톤주의를 표현한다는 두 가지 견해가 교차한다. 신플라톤주의는 미의 감상을 위해서는 시각과 청각을 함께 사용해야 하며, 물질적인 현상세계 속에서 영원하고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직관하고 그것을 미술로 나타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이 그림은 그가 그린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비교되곤 한다.​ 인상주의의 시조라 불리는 마네의 ‘올랭피아’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마네의 올랭피아)

마네의 ‘올랭피아(1863)’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1534)’와 달리 파리의 창부를 표현함으로써, 고전을 타성에 젖어 규범에 따라 모방하기만 하는 당대의 미술을 비판하고 현실을 직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상화되지 않은 몸매의 평범한 창부를 사실주의 화풍처럼 투박한 색채와 질감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고전 회화의 부드러운 분위기와 상징적인 의미 대신 당당하게 관람자를 응시하는 모델과 흑인 하녀, 검은 고양이 등으로 현실적이고 도발적 분위기를 풍긴다.



(티치아노,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페르세우스의 어머니는 아르고스의 왕녀로 이름은 다나에였다. 그녀의 아버지인 아라고스의 왕 아크리시오스는 자기 딸이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왕은 다나에가 남자를 만날 수 없도록 청동탑에 가두게 된다.



(코렛지오, 다나에)<1530>

하지만 비의 신인 제우스가 황금의 비가 되어 그녀에게 내리는 바람에 결국 아이가 생기고 말았다. 태어난 아들이 페르세우스이다. 왕은 아이를 차마 죽일 수 없어 다나에와 아기를 바구니에 태워 바다로 보낸다.



(렘브란트, 다나에)

제우스의 요청을 받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그들을 지켜준다. 후에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죽이고, 안드로메다를 구원한 영웅으로 성장한다. 그 역시 자신이 외할아버지를 죽인다는 신탁을 듣고 피하려 했지만, 우연히 참가한 원반던지기 시합에서 던진 원반이 외할아버지인 아크리시오스를 맞힘으로써 신탁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이다.



(그스타프 크림트, 다나에)

이 신화의 하이라이트는 황금비가 된 제우스와 다나에와의 만남이다. 색채감각이 뛰어난 티치아노는 거칠고 성긴 붓질로 제우스의 등장을 푹풍우 속 구름으로 표현했다. 황금비는 마치 우박처럼 우수수 쏟아지고 있다. 색채의 마술사다운 화가의 솜씨는 커튼과 옷의 질감을 통해 볼 수 있다. 거친 일을 한 것 같은 짙은 피부의 노파를 배치하여 다나에의 피부가 돋보이게 했다.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는 티치아노뿐 아니라 램브란트, 클림트도 그렸다.






이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네의 올랭피아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보고 했다고 하지만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도 참조했다는 생각이 든다. 올랭피아는 다나에보다는 좀 더 벌거벗은 여인으로, 조연인 노파는 좀 더 강렬한 비교를 위해 흑인 여인으로, 황금비는 화려한 꽃다발로 변행했다는 생각이 든다.



(티치아노, 성모의 승천)

티치아노(1488년 추정~1576)는 베네치아 화파의 뛰어난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로 초상화, 신화화, 종교화가 모두 독창적이었다. 뛰어난 색채 사용을 보여 주는 ‘성모의 승천’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명성이 절정에 달했다. 황제 카를 5세의 초상화로 백작으로 임명되었고, 교황 바오로 3세의 공식 초상화를 완성했다.



(티치아노, 거울 앞의 비너스)

티치아노 베첼리오는 1488년경 피에베 디 카도레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형제인 프란체스코와 함께 고향을 떠나, 베네치아로 여행을 떠났다. 어린 티치아노는 베네치아 화파의 위대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로 성장해갔다. 화가로서 굉장한 성공을 거두고 있을 무렵인 1530년에, 그의 아내가 죽는 비극을 맞게 된다. 비탄에 잠긴 이날 이후 그의 작품은 고요하고 묵상적인 분위기를 풍기게 된다.



(티치아노, 카를 5세와 애견)

같은 해에 티치아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를 대관식에서 만났다. 이후 수년간 티치아노는 카를 5세의 초상화를 여러 차례 그렸다. 그의 그림이 카를 5세에게 큰 기쁨을 선사하여 1533년에 황제는 그를 팔라틴 백작으로 임명하고 ‘황금박차의 기사’라는 작위를 수여했다. 화가로서는 굉장히 명예로운 일이었다. 1543년에 볼로냐를 방문하여 교황 바오로 3세의 공식 초상화를 완성했다. 2년 후, 그는 로마로 여행을 떠났다. 그의 일생에 유일한 로마 방문이었다.



(미켈란젤로의 초상화)

1545년 그는 로마에서 미켈란젤로를 만났다. 시스티나 예배당에서의 벽화 작업을 막 끝마친 미켈란젤로는, 티치아노가 베네치아 미술계를 이끌고 있었던 것처럼 로마 미술계를 이끌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이 대가를 만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바사리와 함께 티치아노가 머물던 벨베데레 궁을 갑작스럽게 방문하게 된다. 16세기 미술계의 위대한 화가들인 이들의 만남은 바사리가 쓴 『뛰어난 화가 · 조각가 · 건축가의 생애(1550)』에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 티치아노의 작품을 미켈란젤로와 바사리가 보았다고 적혀 있다.



(미켈란젤로, 천지창조)

미켈란젤로는 티치아노의 그림에 대해 겉으로는 생기 넘치는 화풍을 칭찬하고 특히 색채의 적용이 인상적이라고 말했지만 내심 티치아노의 그림에서 별다른 감명을 받지 못한 듯 “베네치아에서 제대로 된 드로잉 교육이 기초부터 이루어지지 못한 점은 부끄러운 일이다.” 라고 말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화가들인 이 둘은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



(Mamuse, 다나에, 1527)

티치아노는 1548년에 여행을 계속하여 알프스 산맥을 넘어 아우크스부르크에 있는 황제의 궁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위대한 걸작 중 하나인 ‘뮐베르크의 카를 5세’를 그렸다.



(티치아노 자화상)

티치아노는 베네치아로 돌아와 스페인 펠리페 2세의 전속 화가로 일하며 말년을 보냈다. 70세가 넘어 그린 ‘자화상(1562년경)’은 미술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초상화 중 하나이다. 후세에 기억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자신을 수수하고 세련된 화법으로 그려냈다. 특히 옆모습을 그린 것은 영원한 명성을 추구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목에 건 금목걸이와 오른손에 든 붓을 더 선명히 강조하기 위해 단조로운 색상으로 친밀하면서도 근엄하게 보이게 하였다. 목걸이는 황금박차기사 훈장으로, 카를 5세에게 작위를 받을 때 하사받은 것이다.



(티치아노 자화상)



(티치아노, 성모의 승천)

그는 60년 동안 베네치아 회화를 지배했다. 또한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같은 후대의 대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티치아노는 다재다능하고 오래 살았기에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 어떤 형식을 취하든 성공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티치아노는 평생 자신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유화의 한계를 넓혀나갔다. 티치아노는 자신이 그린 ‘성모의 승천’이 있는 산타 마리아 데이 프라리 교회에 잠들어 있다.



(프라도 모나리자)

유럽의 문화가 수 세기 동안 종교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통제되어 온 후 15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사상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수 세기 동안 암흑 속에 있던 고전 문화를 부흥하고 인간과 우주의 관계를 합리적으로 분석하려는 새로운 인본주의의 탄생, 르네상스이다. 르네상스는 문학, 철학, 예술 등 문화 전반에 걸친 부흥 운동으로 가장 먼저 일어난 곳은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는 그리스, 로마의 고전적 유산을 간직한 곳이다. 또한 십자군 원정과 동방과의 교류를 통해 아랍의 수학, 천문 등의 과학을 받아들였고 대학도 발달했다. 이탈리아는 도시 국가들이 독립적인 자치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피렌체는 상업과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시민 계급에 의해 공화정을 유지하였다. 절대권력이나 종교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 주변 지역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부유한 시민 계급은 이들을 후원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공헌했다. 그 한가운데에 메디치 가문이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이탈리아에서 처음 나타났지만, 알프스 이북 플랑드르 지역에서도 유사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플랑드르 지역 역시 상업을 중심으로 자치 도시들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와 새로운 예술이 꽃피고 있었다. 플랑드르 지역의 도시는 종교개혁 이후 신교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는 미술에도 나타나 이탈리아와 플랑드르는 유럽의 르네상스 미술에서 중요한 양대 지역이 되었다. 이러한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고대의 인문주의에 대한 관심이 부활했다.

둘째,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접근 방식이 발달하여 사물을 과학적으로 관찰하고, 규범을 합리적이고 분석적으로 검토했다.

셋째, 새로운 표현 기법이 등장했다. 즉 회화에서 3차원적 공간을 자연스럽게 묘사하기 위해 투시 원근법, 대기 원근법과 명암대조법 등이 보편화되었다. 또한 새로운 매체인 유화가 등장하여 색채와 명암 등을 더욱더 다양하고 풍부하게 나타낼 수 있어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표현이 발달했다.


넷째, 미술가들은 인문학과 예술, 자연 과학까지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지식을 탐구했다. 학식과 교양을 갖춘 미술가들의 활동으로 미술은 단순한 제작을 넘어 지적이고 창조적인 영역이 되었다. 이는 르네상스가 현대 사회에 기여한 업적 중 하나로 예술가는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자신만의 감수성과 지성을 가진 주체적인 존재라는 것을 확립한 것이다.
다섯 번째는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천재들이 거의 동시대에 태어나 각자 다른 개성을 가지고 활동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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