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 9 최영도  (Homepage) 2013-01-15(화) 08:51:30, 3796

아내가 일본으로 연수를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오늘 아침 메뉴는 뭘로 하지? 점심 때는 뭘 먹지? ........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서면 바로 다음 끼가 부담으로 다가온다. 산길 답사 중에도 다음 식사 메뉴가 머릿 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 딸에게 해 줄 식단이 없다. 어제 점심 땐 짜파게티를 업그레이드한 `간짜파게티` 를 시도 해보았다. 평소 같으면 그냥 아무 그릇에나 담아 먹었을 텐데.... 어제는 우리 집에 있는 접시 중 가장 어울릴 만한 하얀 접시에 담아 주었다. 자신감을 잃은 요 며칠 새, 부쩍 격식을 갖추려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내용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를 격식이란 겉치레를 통해 보완하려는 시도로 느껴졌다. 그런데 한 번 두 번 이렇게 격식을 갖추다 보니, 격식에 관한 그 동안의 내 관념에 변화가 생기는 것 같다. 그동안 나는 `격식이란?, 내용을 속이기 위한 겉치레다.`라고 생각하며 격식을 갖추는 일에 소홀했었고,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는 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사랑하는 우리 딸에게 격식을 갖춰 밥을 차려 주다보니, 격식은 내용을 감추려는 속임수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 준비한 내용이 상대에게 온전하게 전달되기 바라는 마무리 정성임을 깨닫게 되었다. 격식을 지키는 일은 상대를 속이기 위함이 아니라 상대를 존중하는 겸손이고, 배려이고, 사랑이고, 예의 임을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이다. 이렇게 늦게 깨우쳤으니 그 동안 몸에 배어버린 나의 습관을 고치기는 힘들 것 같고, 앞으로는 남들이 격식을 차리는 모습을 보게 되더라도, 경멸하거나 이단 시 하지 않고, 존중해야 겠다고 다짐하며, 오늘 점심에는 또 뭘 준비하지? 깊은 고민에 빠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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