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라는 말 김영국  (Homepage) 2023-09-10(일) 08:54:27, 56338

#1 “톰, 왜 아직 리포트 안 냈어?” “어제 연구실에 갔는데 당신이 안 계셔서 못 냈습니다.” “뭐, 당시인?” “???????” #2 “재판관님, 변호인의 변론이 피고인의 입장과 맞는지 확인해주십시오.” “당신이 변호인입니까?” “당신이라뇨? 검사한테 당신이라고 말하는 게 맞습니까?” “당신은 존칭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에게도 당신이라고 합니다.” “.............” #1은 ‘당신’을 2인칭의 존대라고 배운 외국인 학생이, ‘당신’이라는 말에 불쾌한 반응을 보인 교수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장면이다. #2는 이화x 전부지사의 재판을 지연시킬 목적으로, 피고인 의사에 반하여 출석한 김형x 변호사와 검사의 설전 장면이다. 사건과 관계없는 논쟁으로 재판을 끌다가 재판부 기피신청, 변호인 사퇴 등으로 재판 지연에 성공했다. 변호인은 그 미션에 ‘당신’을 분란의 불쏘시개로 사용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외국인이 우리말을 배우는 데 가장 어려운 관문은 존대법이다. 그 중에서 2인칭대명사, 그 중에서도 ‘당신’은 내국인도 헷갈린다. 본디는 ‘너’의 존칭이었는데 의미가 격하되면서 그 쓰임이 다음과 같이 복잡해졌다. 1. 문어체나 불특정 대상을 가리킬 때는 존칭이다. “당신의 관심이 환경을 지킵니다.” 2. 대화의 상대를 지칭할 때는 비칭이 되기도 한다. “당신이 깜빡이도 없이 끼어들었잖아!” 3. 부부 간의 호칭으로 쓰인다. “당신, 오늘 힘들었지?” 4. 3인칭재귀대명사로 쓰일 경우는 극존칭이 된다.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당신의 장서를 소중히 다루셨다.” 이렇게 까다로우니 오늘날 젊은이들은 아예 이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문어체나 노랫말(그것도 주로 트롯)에만 쓰이고 있으니 곧 사어(死語)가 될 운명이다. ‘당신’이 이러하니 마음 편히 사용할 수 있는 2인칭대명사가 아직 없는 상태다. 우리말 언중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어려운 문제다. 비교언어학에서 존비에 따른 2인칭대명사의 분화 유형을 네 부류로 나누었다. 우리 고민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 존비에 따른 구분이 없는 언어: 136개(영어 등) 2. 존비에 따라 두 가지가 있는 언어: 49개(불어 등) 3. 존비에 따라 세 가지 이상이 있는 언어: 15개 4. 너무 어려워 사용을 기피하는 언어: 7개(한국어, 일본어, 인니어, 베트남어, 태국어 등) 초면에 상대방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다. 자칫 잘못하면 오해를 받거나,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시비가 붙을 수도 있다. ‘너’가 있지만 ‘너’를 마음 놓고 쓸 수 있는 상대는 극히 제한돼 있다. ‘그대’ ‘자네’ 등도 거의 쓰이지 않아 ‘당신’과 같은 처지에 놓여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그 사람의 직책이나 화자(話者)와의 관계를 따져 부르는 것이다. 직책은 명함을 교환하기 전에는 알 수가 없고, 관계는 생년월일, 출신학교, 몇 학번 등 호구조사가 끝나야 겨우 정할 수가 있다. 그래서 가장 무난한 호칭으로 ‘선생님’이 떠오르고 있다. 남녀 따질 것도 없고, 나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존대의 뜻도 담겨 있으니 괜찮을 듯도 하다. 그러나 그것도 어색한 경우가 많다. 식당 같은 데서는 ‘이모’ ‘언니’라는 이름으로 종업원을 부르다가 요즘은 ‘저기요’‘여기요’가 경쟁하고 있다.  손님을 ‘아버님’ ‘어머님’으로 부르다가 이제 ‘고객님’으로 통일되고 있다. 지하철에서 난동을 부린 여성에게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가관이었다. 큰 소리로 전화하고 있는 행동에 대한 지적보다 ‘아줌마’라는 호칭에 뚜껑이 열렸다고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대체 뭐라고 불러야 이 살벌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골치가 아프다. 근본문제는 존비법이다. 이걸 아예 없애버릴 수는 없을까. 모두가 평어를 쓰기로 하고 존칭이나 비칭을 쓰면 벌금을 매기는 법을 만들면 어떨까.^^ 교육, 언론 등에서 호응하면 세월이 좀 걸리긴 해도 안 될 건 없을 것 같다. 존비법이 사라지면 우리 사회가 수평구조로 한걸음 더 다가갈 것이다. 소통은 늘어나면서 갈등은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문화 전반이 다채로워지고 활기가 넘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단체스포츠 경기력도 높아질 것이다.(히딩크를 상기하시라.) 무엇보다 존비법, 호칭법 스트레스에서 해방된 한국인들의 행복지수가 수직상승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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