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에 대한 변명 김영국  (Homepage) 2021-05-27(목) 19:55:07, 16861

“할아버지 배가 아파요. 토할 것 같아요.” 초등 3학년 손주가 울먹이며 내 눈치를 본다. 작년까지 엄마 따라 엄마 학교로 등교하다가 그 자리를 동생에게 물려주고, 이사 온 아파트 옆 학교로 전학한 터다. 엄마가 전권을 할아버지한테 넘겨주고 출근해버리자 한사코 나에게 매달렸다. 고3 담임 때 종례만 끝나면 혹은 머리를 짚고 혹은 배를 움켜잡고 교무실로 따라와서는 내 약한 고리를 흔들었다. 야자 시간엔 우리 교실의 빈자리가 매번 제일 많았다. 손주도 본능적으로 그 고리를 알아내고 두드렸다. 일주일 1~2회의 등교수업일은 매번 작은 전쟁이었다. 그러나 야자와 정규수업을 혼동할 수는 없지. 눈 지끈 감고 등을 떠밀었다. 안쓰럽고 걱정도 되었지만 하교할 땐 언제나 전혀 딴판이었다.  친구들과 재재거리다가 나를 발견하면 쪼르르 달려왔다. 학교생활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다만 갑자기 바뀐 환경이 두려웠던 것이다. 소심하기 때문이다. 손주의 소심을 탓할 수가 없다. 할아버지의 소심 DNA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다. 소심은 어려서부터 나의 콤플렉스였다. 겁이 많았다. 나에게 용기는 (요즘 말로) 1도 없는 것 같았다. 높은 나무에 오르지도 못했고, 동네 수문통 위에서 바다로 뛰어내려보지도 못했다. 친구와 한판 떠본 경험도 없다.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들이대보지도 못했고, 각종 대회에 도전해보지도 않았다. 철이 들고 나서 이 약점을 극복해보려고 나름 노력해봤지만 별무소득이었다. 아버지가 너무 엄해서 내가 이렇게 쪼그라들었나 의심도 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천성이 소심하고 겁이 많고 우유부단했다. 가끔 내게 용기가 조금 더 있었다면, 그래서 겁이 조금만 더 없었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를 생각해본다. 두려움 없이 일을 벌이고, 용감하게 들이댔다면 지금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상상해보기도 한다. 어쩌면 나만 소심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나의 소심을 눈치 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저 매사 신중하고 진중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용하고 겸손한 사람, 자기 절제를 잘하고 상대방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사람으로 과대평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거꾸로, 저렇게 사람 좋아 보이는 사람도 어쩌면 나처럼 소심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소심해서 덤비지 못하고, 두려워서 겸손한 척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용감한 행동을 하는 사람도 실은 두려움을 누르거나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의 조상은 다들 소심한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진짜 두려움이 없고 용감한 사람들은 전쟁터에서 앞장섰다가 화살과 총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전쟁이 아니라도 어렵고 위험한 일에 몸을 사리지 않고 나섰다가 희생되었을 것이다. 그런 결정적인 상황에서 혹은 비겁하게 혹은 지혜롭게 뒷전에서 살기를 도모한 사람들이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의 조상일 것이다. 편도체에 이상이 있으면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이를테면 맹수가 달려들어도, 깡패들 앞에서도, 낭떠러지에서도 두려움이 없다. 그렇게 보면 겁이 많은 것이 오히려 정상이다. 인간은 긴 시간 동안 차츰 소심한 쪽으로 진화해왔을 것이다. 그것이 생존의 길이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사회는 옛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곳곳에 상시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한시라도 방심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고 남의 생명을 앗을 수도 있다. 공연한 허장성세보다 소심이 자신이나 사회를 지켜주는 미덕이다. 내가 본디 소심했고 천성대로 소심하게 살아왔기에 오늘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내가 이렇게 가늘고 길게 조심조심 살아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아마 그렇게 살 것 같다. 정신과 의사 보르빈 반델로는 소심을 예찬했다. “위대한 일을 성취하려면 겁이 많아야 한다. 두려움으로부터 끝없는 에너지가 샘솟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인류의 역사는 소수의 용기 있는 사람들에 의해 발전해온 것이 아닐까. 신대륙을 발견하고, 남극을 탐험하고, 에베레스트 산을 오른 사람들은 다 용감한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그런 사람이 없었다면 우주 탐험은 누가 할 것인가. 그런데 반델로는 큰일을 해낸 소심한 사람을 끝없이 열거하여 나의 의심을 잠재워주었다. 블록버스터 영화의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 공포영화의 개척자 알프레드 히치콕, 미국 현대문학의 선구자 에드가 앨런 포우, <변신> <성> <심판>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 마이크로 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 노벨상을 만든 알프레드 노벨, 진화론의 찰스 다윈....... 정신과 전문의의 눈으로 볼 때 이들은 다 소심하였고, 그 소심 때문에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고 판단하였다. “서진아, 소심은 부끄러운 성격이 아니다. 위험한 일, 어려운 일, 익숙하지 않은 일 앞에서 두려워하고 주저하는 것은 너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다들 마찬가지다. 다만 사람에 따라, 어떤 일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를 뿐이다. 어떤 사람이 고양이를 두려워한다고, 높은 곳에 오르기를 겁낸다고, 물을 싫어한다고 아무도 그를 흉보지 않는다. 오히려 만용을 부려 일을 함부로 저지르는 사람이 자신이나 사회에 큰 손실을 끼치고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을 범하는 경우가 문제다. 서진아, 소심하다고 큰일을 못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정신과 의사는 겁이 많아야 오히려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 그런 사람을 숱하게 많이 예로 들더구나. 새로 전학한 학교에 가기 싫다고 부모님과 할아버지한테 떼 좀 썼다고 부끄러워하지 말아라. 소심하다고 행여 주눅들지도 말아라. 소심은 인류 진화의 결과란다. 예쁘고 총명하고 상냥한 서진아, 할아버지는 네가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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