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의 기술 김영국  (Homepage) 2019-05-26(일) 20:29:19, 3179

동여고 재직 시 논술 지도 문제로 고심을 좀 했다. 괜찮은 대학들은 대학별고사에서 논술을 채택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그 지도에 손을 놓고 있었다. 학생들도 논술 준비는 으레 학교 바깥에서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근 학원 강사, 서울 유명 강사, 원격교육 등을 시도해보았으나 신통치가 않았다. 그래서 차라리 우리 학교 선생님에게 맡겨보자고 생각하여 근무 연한이 남은 국어선생님을 면담했다. 취지와 배경을 설명하고 가장 힘든 첨삭 지도는 내가 맡겠다고 제안했다. 논술 지도 경험은 앞으로 국어교사로서 좋은 무기가 될 것이라고 부추겼다. 얘기가 진행되는 동안 얼굴이 굳어지더니 결국 못 하겠다고 거절했다. 다음 선생님은 소문을 이미 들었는지 들어올 때부터 표정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본론에 접어들기도 전에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다음 선생님은 마음 여린 교장에게 곁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코치를 받았는지 아예 앉지도 않으려 했다. 그때 내가 받은 상처는 컸다. 생소한 논술 지도를 덜컥 맡겠다고 나서기가 두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는 얼굴에 철판 잠시 깔면 일 년이 편안하다는 말이 유행할 때라 나의 부탁이 무리였을 수 있었다. 그래도 상대방을 배려하며 거절할 수는 없었을까. 명색이 국어선생님인데 말을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 혼자 투덜거리다가 문득 떠올랐다. 맞다. 우리가 거절의 방법을 배운 적이 없다. 일상의 언어부터 가르쳐야 했는데, 그것이 국어 실력이고 언어 능력인데 우리는 어디에서도 누구에게서도 그것을 배운 바가 없는 것이다. 사실 학교에서 거절 내지 사양의 요령이나 예절을 배웠다면 우리의 삶이 한결 가볍고 원만하지 않았을까. 마음 여린 사람은 부탁이나 명령을 받으면 그때마다 덥석덥석 받아들였다. 거절하면 안 되는 줄 알았다. 거절하면 인간관계가 파탄 나는 줄 알았다. 반면에 얼굴 두꺼운 사람은 안면 몰수하고 단박단박 거절했다. 거절당한 사람은 상처를 받고, 그 사람은 편안해지고 결국 구성원 간의 일의 분량이 불공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배우지 않았는데도 거절의 기술을 터득하여 슬기롭게 처신한 사례가 있다. <나를 믿어준 한 사람의 힘>은 박상미 교수의 인터뷰 모음이다. 이 시대 내로라하는 사람들 중에 배우 김혜자가 첫 번째로 등장한다. 박교수가 방송에서 강연하는 것을 보았는데 거기서도 그 배우를 예찬하였다. 그 배우의 자질을 높이 보았기 때문이겠지만 박교수가 특히 그 배우에게 빠진 계기는 그 배우의 ‘거절의 기술’에 연유한다. 여러 번 인터뷰를 간청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박교수는 섭섭함보다 자기가 존중받고 있다고 느꼈다. 어떻게 거절했기에 몇 번의 거절에서 오히려 배우 김혜자의 인품의 진면목을 보았다고 했을까.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김혜자예요. 저는 이제 촬영 끝나고 집에 가는 중입니다. 정신은 맑지만 몸이 무겁네요. 드라마 보시고 좋다고 하시니 감사합니다. 작가의 산뜻한 의도를 잘 표현해보려고 이리저리 상상해보며 연기하고 있어요. 제가 이렇게 길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마음이 몹시 분주하고 여유가 없다는 얘기를 하느라고요. 말실수를 잘해서 본래 인터뷰를 겁내는데....... 이해해주세요.” 한 무명 배우가 영화 오디션에 도전했다. 여러 번 실패한 터라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역시 낙방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알려준 문자 메시지에 감동했다. 떨어진 사람에겐 연락조차 안해 주던 때라 그 감동이 컸던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오디션 봤던 영화의 조감독입니다. 연기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맞는 배역이 없어 같이 작업을 못할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언젠가 꼭 좋은 기회에 다시 뵙고 싶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 조감독이 드디어 독립하여 영화를 찍게 되었다. 그때 그 배우가 생각났다. 초짜 감독의 영화에 과연 출연해줄까를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전화를 걸었다. 그 배우는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승낙했다. “난 이미 5 년 전에 당신 영화에 출연하기로 결심했어요.” 그 영화가 <살인의 추억>이다. 짐작하겠지만 그 감독이 봉준호이고 그 배우가 송강호였다. 따뜻한 거절이 연결고리가 되어 만난 두 콤비는 천만 영화 <괴물> <설국 열차>를 만든 뒤 드디어 <기생충>으로 칸 영화제 최고상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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