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 이야기 김정식  (Homepage) 2012-11-10(토) 06:27:15, 10067

남미의 한 ‘인디오’족에게는 그들의 생업인 말가죽에 대한 어휘는 2백여 개나 되는데 색깔에 대한 어휘는 셋밖에 없다고 한다.   옛 우리 조상들도 색감에는 별로 민감하지 않은 듯, 고전 문학 작품에 나타난 색깔은 기껏 오색(白․黑․靑․紅․黃)에 불과하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할 때에 쓰는 흰빛이 백설(白雪)․백발(白髮)․백운(白雲)․백사(白沙)․백구(白鷗)․백마(白馬)․백골(白骨) 등으로 나타날 뿐, 다른 색을 통한 비유는 찾아보기 힘들다.   아마도 유교 사상에만 젖어 있던 때여서 유색(有色)은 야하고 난하다는 사조로 해서 금기였으리라. 이 점은 이웃 나라도 마찬가지인 모양. 한 시대 전만 해도 우산, 안경테와 만년필, 청진기, 전화기, 승용차 등 일본을 거쳐 들어온 것은 거의 검은색이다. 같은 유교권이라서 위엄의 표시였을까?   그보다 흑백의 근원적인 연고는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처럼 선비의 지조와 청백(淸白)을 상징하는 것이고, 수녀복의 흑백 역시 엄숙과 순수의 표상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색깔 표시 낱말은 매우 발달하여 ‘발갛다, 벌겋다, 불그레하다, 불그스럼-, 불그무레-, 볼그족족-, 불그데데-, 불그숙숙-’ 등 3백 남짓으로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많으리라. 이렇게 풍부한 우리의 색깔 표시 낱말은 의성어, 의태어와 함께 문학 작품에서 우리의 정서를 미묘하게 잘 표현하게 해 준다. 하나 외국어로 번역하면 작품에서 풍기는 맛이 다 죽어버리는 안타까움도 있다.   ‘새빨간 거짓말’이 있는가 하면 ‘새파랗게 질렸다.’도 있고 ‘싹수가 노오랗다.’도 있다. 게다가 ‘노오란 웃음, 노오란 음성’도 있다.  조지훈의 시「승무」에 나오는 <파르라니 깎은 머리….>의 ‘파르랗다’와 <약주 서너 잔에 불콰한 얼굴>의 ‘불콰하다(얼굴빛이 보기좋게 불그레하다.)’는 새로 나온 사전에만 올려져 있고, 연두색과 초록의 중간인 ‘포오란’은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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