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시 추억 7 정일근  (Homepage) 2017-11-20(월) 19:53:20, 7291

이제야 너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너무 늦었다 그렇다고 울지는 않는다 이미 잊힌 사람도 있는데 울지는 못한다 지상의 내 발걸음 어둡고 아직 눅은 땅 밟아가듯이 늦은 마음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 모두 떠나고 난 뒤면 등불마저 사위며 내 울음 대신할 것을 이제야 너의 마음에 전했다 너무 늦었다 캄캄한 산 고갯길에서 홀로 〈윤후명/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 ~~~~~~~~~~~~~~~~~~~~~~~~~~~~~~~~~~~~~~~~~~~~~~~~~~~~~~~~~~~ 첫눈이 내렸다. 첫얼음이 얼고, 첫서리가 관측된 지는 오래다. 첫눈, 첫얼음, 첫서리…, 바야흐로 하늘과 땅이 추워지는 시간이 찾아왔는데 ‘첫’이란 접두사가 붙은 그 말에 나는 소년처럼 가슴은 뛰고 몸은 뜨거워진다. 사람의 인생에서 무엇이든 처음은 아름다운 일. 아름다워서 평생 동안 가슴속에서 지우지 못하는 따뜻한 등불 같은 이름이 있다. 첫길, 첫날밤, 첫사랑, 첫새벽, 첫 키스…, 가슴이 따뜻해지는 그런 말 뒤편에는 흑백사진으로 남아 우리의 피를 아뜩하게 하는 이름이 숨어있는 것이다.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는 시인이며 소설가인 윤후명의 시집 이름이기도 하다. 그 시집의 속표지 하얀 여백에 ‘92년10월23일, 서울’이라는 내 글씨가 남아있다. 나는 1992년 가을, 서울에서 그 새 시집을 사서 그해 겨울까지 ‘사랑’으로 읽었다. 시집의 자서(自序)에는 내가 4B연필로 밑줄 친 문장이 있다. ‘무엇을 잃고 사는지를 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무엇을 잃고 사는지도 모르고 산다는 것은 더 불행한 일이다. 그 무엇이 사랑일 때 그 어찌할 것인가.’ 시인의 말에 밑줄을 치며 나는 잃고 사는 사랑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때 서른 중반에 도착한 나는, 마흔 중반을 넘긴, 사랑을 잃고 산다는 윤후명의 시들을 읽으며 그의 소설인 ‘돈황의 사랑’같은 사랑을 다시 꿈꾸었다. 내 삶이 늘 자갈밭에서 노숙하여 등이 뼈아프게 배기는 일과 같아서 사랑을 꿈꾸는 것이 ‘브룩클린으로 가는 비상구’였다. 저 막막했던 80년대, 시인의 자리에서 소설가의 자리로 자리를 바꿔 앉은 그의 소설 ‘돈황의 사랑’은 이른바 386세대에게 몽환적인 사랑을 꿈꾸게 했었다. ‘달밤이다. 먼 달빛으로 사막을 사자 한 마리가 가고 있다. 무거운 몸뚱이를 이끌고 사구(砂丘)를 소리 없이 오르내린다. 매우 느린 걸음이다./쉬르르르 쉬르르르. 명사산의 모래가 미끄러지는 소리인가. 사자는 아랑곳없이 네 발만 차례차례 떼어놓는다. 발자국도 모래에 묻힌다. 달이 더 화안히 밝자 달빛이 아교에 이긴 은니(銀泥)처럼 온몸이 끈끈이 입혀진다. 막막한 지평선 끝까지 불빛 한 점 반짝이지 않는다. 사막의 한복판에 사자의 그림자만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다.’(소설 ‘돈황의 사랑’ 중에서) 젊은이들을 열광하게 한, 동시대 젊은 시인들을 절망하게 한 문체의 미학은 그 시대를 살던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꿈꾸게 했다. 돈황의 사랑마저 꿈꾸지 못했다면 나의 20대도 당신의 20대도 불우했을 것이다. 1982년에 ‘돈황의 사랑’을 읽고, 1992년에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를 읽으며 20대를 보내고 30대를 보내며 사랑이 상처인 사람은 생(生)도 상처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이제야 너의 마음 알 것 같다/너무 늦었다’고 중얼거리는 듯한 고백이 명사산 모래가 무너지듯 내 상처를 덮었다. 그리고 그 상처에 등불을 밝혀주었다. 늦었지만, 너무 늦었지만 울지 못하는 우리들의 상처에 대해 시인은 ‘거칠고 마디 굵은 손으로 만져야/불행도 제값일진저/다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윤후명의 시 ‘貧者의 자장가’에서)라고 호명하며 자장가를 불러주어 행복했다. 어디 아프지 않은 생이 있으랴. 어느 인터뷰에서 읽은 윤후명 시인의 삶도 그늘이 많은 신고(辛苦)의 사막 길이었다. 지난해 이맘쯤 경주에서 그를 처음 보았다.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의 〈청록집〉이 나온 지 60년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그도 지상의 발걸음으로 어둡고 눅은 땅 밟아가듯이 60년을 걸어온 해였다는 것을 그 뒤에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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