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몸 바람의 길 정일근  (Homepage) 2013-10-06(일) 20:44:37, 3883

그대. 바람의 몸을 보신 적이 있는지요.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 어디인지 궁금했습니다. 나무의 무성한 나뭇잎 하나 하나를 모두 흔들고 가는 바람을 보면서, 그 바람이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돌아가는지 궁금했습니다. 그 때는 사는 것이 바람 같았으면 생각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바람이 되고 싶었고, 또한 바람처럼 떠나고 싶었습니다. 삶이 땅에 뿌리 박고 서있는 나무 같아서, 가지마다 잔뜩 잎을 달고 살아가는 나무 같아서 저를 송두리 채 흔들고 가는 바람이 좋았습니다. 그 뜨거웠던 시절, 보리밭에서 바람의 몸을 보았습니다. 푸른 도화지처럼 펼쳐진 보리밭 위를 스치던 바람은,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자신의 몸을 그 도화지 위에 그리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그려지던 바람의 몸,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대자유이었습니다. 임금님의 당나귀 귀를 본 복두장이처럼 저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졌고, 그 비밀로 저는 오래 뜨거운 바람이었습니다. 오늘은 산사에서 바람이 흔드는 풍경 소리를 듣습니다. 풍경소리 멈추자 참 고요합니다. 그대. 저 물고기가 가르치는 바람의 길을 바라보다 바람의 고향이 고요함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바람은 자신의 고요함으로 돌아오기 위해 부는 것인지 모릅니다. 사람의 사랑이 뜨거운 태풍인 것도 이런 고요함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그렇게 세차게 불어오고 불어가는 것인가 봅니다. 그대. 그대는 어떤 바람입니까. 먼바다에 지금 태풍이 찾아오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뜨거움 뒤의 고요를 생각하며 그 바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풍경 아래 달린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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