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붉어지는 이유 정일근  (Homepage) 2012-11-21(수) 13:24:11, 3955

▶ 나무가 붉어지는 것은 환희가 아니라 반성일 것입니다. 달력 속의 ‘11’이라는 숫자가 허전하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1월과 11월은 1과 1의 반복인데도 새해를 여는 1은 희망적이지만 11이라는 숫자 앞에서는 만추의 저녁처럼 유정해집니다. 달력 속에서 1은 눈 위에 찍힌 발자국처럼 선명하지만 11은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판처럼 허전합니다. 그런 11월입니다. 해는 짧아지고 저녁 그림자는 길어지고 있습니다. 2012년을 시작할 때 신으로부터 366일을 선물받았는데 어느새 300여 일이 주머니 속에서 빠져나가 버렸습니다. 손에 쥐어도 빠져나가는 물처럼 시간은 그렇게 흘러갑니다. 남은 40여 일도 만지작거리는 사이 쏜살같이 달아날 것이고 우리는 이내 빈손이 될 것입니다. 한 해의 마무리를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12월에는 너무 늦을 것 같습니다. 12월은 다시 새해를 준비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지난 새해에 했던 나와 나의 약속을 정리하려 합니다. 비망록에 남겨 두었던 기록들을 챙겨 보고 후회되는 일들을 반성하며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처럼 겸허해지려 합니다. 나무도 11월에는 붉어집니다. 붉어지며 한해살이를 마무리합니다. 나무가 붉어지는 것도 환희가 아니라 반성일 것입니다. 빈손으로 또 한 해를 보내는 내 얼굴이 붉어지듯 나무도 붉어지며 묵언의 겨울과 연두 빛 새잎 돋는 봄을 준비할 것입니다. 나는 너무 많은 잎을 달며 11월에 섰습니다. 지키지 못한 약속과 허언의 잎들 발갛게 태워버려야 할 때입니다. 태워서 버려야 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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