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 송성수  (Homepage) 2008-10-17(금) 16:02:46, 3949

몇 년전부터 유행하고 있는 통섭에 대해 몇 자 적어봅니다. 통섭은 모든 학문에 통하는 섭리인가, 아니면 통 섭섭하다의 준말인가? ^^ ------------------------------------------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은 오늘날의 중요한 화두가 되었고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여기에 기폭제 혹은 매개체로 작용한 책으로는 유명한 사회생물학자인 윌슨(Edward O. Wilson)이 1998년에 발간한 <통섭: 지식의 대통합>(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을 들 수 있다. <통섭>은 학문들 사이의 경계를 가로지르면서 이를 하나로 엮는 작업의 중요성을 설파한 책이다. 윌슨은 21세기 대학개혁의 목적이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을 통섭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지금의 대학생들이 “과학과 인문학의 관계는 무엇이고, 그 관계가 인류의 복지에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도록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통섭이 강조되고 있는 이유는 학문이 점차적으로 전문화·세분화되면서 학문분야 사이의 대화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인문학과 과학은 “두 문화”(two cultures)라 불릴 정도로 심각한 갈등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두 문화는 물리학자 출신의 작가인 스노우(Charles P. Snow)가 1959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의 리드 강연에서 제기한 문제로서 상당한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당시의 강연에서 스노우는 유명한 과학자에게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무엇인지”를 물었더니 그 과학자는 “무슨 책? 나는 책을 연장으로 쓰는 것을 좋아하지”라고 응답했다는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스노우는 인문학자 중에 열역학 제2법칙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그것은 과학자가 셰익스피어를 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꼬집기도 하였다.   통섭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19세기 과학자이자 철학자인 휴얼(William Whewell)이었다. 그는 1840년에 출간된 <귀납적 과학의 철학>(The Philosophy of the Inductive Sciences)에서 통섭을 더불어 넘나든다는 의미로 사용하면서 과학을 비롯한 학문의 성장을 강에 비유한 바 있다. 여러 갈래의 냇물들이 모여 강을 이루듯이, 먼저 밝혀진 진리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둘씩 합쳐지고 결국 하나의 커다란 흐름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휴월의 통섭은 융합적 통섭(confluent consilience)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에 반해 윌슨이 주장하는 통섭은 환원주의적 통섭(reductive consilience)이다. 모든 학문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마음과 본성을 연구하는 자연과학, 특히 생명과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통섭이 “인간 종의 고유한 특성과 문화가 자연과학과 인과적인 설명으로 연결될 때에만 온전한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윌슨은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을 잇는 매개 분야로 인지뇌과학, 인간행동유전학, 진화생물학, 환경과학에 주목하고 있는데, 그에게 이러한 네 분야는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을 잇는 교량의 역할을 한다기보다는 인문사회과학을 자연과학으로 환원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윌슨이 주장하는 환원주의적 통섭이 통섭의 최종 단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명시적 혹은 묵시적으로 환원주의적 통섭에 반감을 표방하고 있다. 학문들 사이에 대화의 물꼬를 트자는 제안에는 어렵지 않게 공감할 수 있지만, 다양한 학문들을 특정한 몇몇 분야로 환원하자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같이 두 문화 현상(문과와 이과의 분리 등)이 심각한 경우에는 현재로서는 섣불리 통섭을 주장하기 보다는 조심스러운 접촉이나 소통을 강조하는 편이 나을 것으로 보인다.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대화를 촉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교차(crossing), 희석(blurring), 부정(denying)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과학사는 과학과 역사를 교차하는 방법에 해당하고, 문학 속의 과학을 살펴보는 것은 문학과 과학의 경계를 희석시키는 방법이라 할 수 있고, 과학의 사회적 성격을 고찰하는 시도는 과학과 사회의 경계를 부정하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은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과학기술에 대한 인문사회과학)이 성장하면서 활발히 시도되고 있으며, 그 결과 과학은 일련의 문화적 행위들 중의 하나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사실상 다른 분야와 소통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분야에 접근한다는 것은 다른 언어를 쓰는 다른 문화권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코넬 대학의 물리학자인 머민(David Mermin)은 과학자와 사회학자의 글쓰기 스타일에 차이가 난다는 점을 지적한 후에 두 집단의 생산적인 대화를 위해 필요한 세 가지 규칙을 제시하기도 했다. 상대의 의도를 짐작해서 그것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상대가 한 말에 초점을 둘 것, 다른 전공을 하는 상대가 내 전공의 미묘한 점을 이해할 수 있다고 기대하지 말 것, 다른 전공자들의 언어에 쉽게 뚫고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지 말 것이 그것이다. 이처럼 다른 분야와의 소통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침묵할 필요는 없다. 보다 적극적으로 다른 분야와의 대화를 준비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외국을 여행할 때 여권과 비행기표만을 준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여행자들은 목적지를 소개한 책자를 보고, 간단한 외국 말을 공부하는 등 여행을 위한 준비를 하기 마련이다. 많이 준비할수록 더욱 유익한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다른 분야와의 만남도 이와 흡사하다. 상대에게 나의 지식을 가르치겠다는 태도가 아니라 낯선 문화를 탐구하는 여행자의 태도가 중요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점을 고려한다면, 과학과 인문학의 완전한 통합을 주장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로 더 많은 차이와 더 이질적인 문화를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과학자냐 인문학자냐 하는 문제는 더 이상 분리나 배제의 근거가 아니라 차이를 생성하는 다양한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도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두 문화 현상이 점차적으로 완화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새로운 형태의 간학문적(inter-disciplinary), 다학문적(multi-disciplinary), 초학문적(trans-disciplinary) 분야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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