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우마제인> 제2호 (2023년 12월)에 실린 글입니다. 타우마제인(thaumazein)은 '경이로움' 혹은 '놀라움'을 뜻하는 그리스 말이라고 합니다. 원래 제목은 "인공지능은 규격화된 업무에 유능하다" 였는데, 잡지사에서 "규격화된 업무의 끝판왕, 인공지능"으로 바꾸었습니다.
인공지능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2016년 3월의 알파고를 시작으로 올해 상반기의 챗GPT에 이르기까지 인공지능은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인공지능은 강한 인공지능과 약한 인공지능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특정한 문제를 처리하는 데 국한되며 ‘좁은 인공지능(artificial narrow intelligence)’으로도 불린다. 후자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과제를 감당할 수 있는 ‘범용 인공지능(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에 해당한다. 인공지능이 특이점에 도달하여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면 초지능(superintelligence)이 된다.
강한 인공지능이나 초지능에 과도하게 주목하는 것은 우려스럽다. 그것이 구현가능한지, 언제 실현될 것인지, 그럴 경우에 인간이 노예로 전락할 것인지 등은 흥미로운 질문이긴 하지만,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과제를 간과하거나 외면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불확실한 미래를 상정하고 이에 비추어 현재를 진단하는 것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제는 인공지능에 보다 ‘현실주의적 접근’을 취할 필요가 있다. 현실주의란 거창한 사조가 아니라 현실의 조건이나 상태를 인정하고 그것에 입각하여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 자율주행차량과 인간 운전자
인공지능과 일자리에 대해서는 낙관론과 비관론이 공존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만큼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라는 입장과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계속 잠식하면서 결국 인간의 노동이 소멸할 것이라는 입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매우 복잡하게 전개될 것이며, 인공지능의 수준이나 일자리의 종류에 따라 상당한 편차를 보일 것이다. 여기서는 자율주행차량(autonomous vehicle, AV)의 사례를 통해 인공지능과 일자리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미국의 자동차공학회는 주행 자동화의 수준을 아래의 <표>와 같이 구분한 바 있다. 현재로서는
수준 0, 1, 2의 자동차가 도로 위를 달리고 있으며, 선도적인 기업들은 수준 3이나 수준 4의 자율주행차량을 개발하고 있다.
<표> 주행 자동화의 여섯 수준
수준 / 명칭 / 특징
수준 0 / 비자동화
- 인간 운전자가 주행의 모든 측면을 담당
- 차량의 시스템은 긴급 상황 알림 등 보조 기능만 수행
수준 1 / 운전자 보조
- 자동화 시스템이 특정 모드에서 조향 혹은 가․감속 중의 하나를 수행
- 나머지 부분은 인간 운전자가 담당
수준 2 / 부분 자동화
- 자동화 시스템이 특정 모드에서 조향과 가․감속을 모두 수행
- 나머지 부분은 인간 운전자가 담당
수준 3 / 조건부 자동화
- 자동화 시스템이 주행의 거의 모든 측면을 담당
- 인간 운전자는 시스템이 개입을 요구하는 경우에 적절히 대응해야 함.
수준 4 / 고도 자동화
- 일부 환경에서 자동화 시스템이 주행의 모든 측면을 담당
- 시스템의 개입 요구에 인간 운전자가 대응하지 않더라도 시스템은 주행을 계속
수준 5 / 완전 자동화
- 모든 환경에서 자동화 시스템이 주행의 모든 측면을 담당
- 인간 운전자가 필요하지 않으며, 탑승자만으로 주행이 가능
만약 모든 차량이 한꺼번에 수준 5로 이행한다면 인간 운전자의 역할이 없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전면적으로 실현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완전 자동화가 이루어지려면 자동화 시스템 자체가 발전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동통신의 고도화, 빅데이터의 축적, 도로 상황의 개선 등과 같은 제반 여건이 갖추어져야하기 때문이다.
부분적인 차원에서 완전 자동화가 실현될 수는 있다. 정해진 경로를 따라 운용되는 차량이 이러한 예에 속한다. 사실상 우리나라에서도 몇몇 도시의 전철이 큰 문제없이 무인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그것은 차량이 이미 정해진 궤도를 달리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를 조금 더 확장하면, 특정한 구간을 왕복하는 셔틀차량을 무인으로 운용하는 방법이 가능해진다.
인간이 거의 필요 없는 차량으로 거론되고 있는 것은 자율주행트럭(autonomous trucks)이다. 트럭은 주로 고속도로를 이용하기 때문에 이동경로가 정해져 있고 주행 환경의 예측도 용이하다. 자율주행트럭의 경우에는 군집주행(platooning)도 가능하다. 한 대의 선도 차량에만 운전자가 탑승하고 여러 대의 추종 차량이 쫓아가는 실험은 몇 차례 시도된 바 있다.
무인 셔틀차량이나 자율주행트럭이 상용화되면 인간 운전자의 일자리가 줄어든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사업주의 입장에서는 일자리 축소로 얻는 경제적 이익이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데 드는 비용보다 클 때 자율주행차량을 도입할 것이다. 노동자의 저항이나 법규의 정비도 중요한 문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때 ‘한국의 우버’로 불렸던 타다가 택시업계의 반발과 관련 법규의 미비로 실패하고 말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인간 운전자가 탑승하는 자율주행차량의 경우에도 운전자의 근로조건이 저하된다면 이에 대한 집단적인 저항이 발생할 수 있다.
자율주행차량을 매개로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난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자율주행차량의 개발과 정비에 관한 일자리가 계속 증가할 것이다. 또한 자율주행차량이 확산되면 인간 운전자의 부담은 줄어들고 차량 내의 여가 활동이 증가할 것이기 때문에 이에 필요한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스마트폰이 처음 출현했을 때에는 오늘날과 같이 어플 앱 개발에 관한 일자리가 큰 폭으로 증가할 지를 거의 상상하지 못했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 인공지능이 대체하기 어려운 인간의 능력
하나의 일자리나 직업은 여러 업무로 구성되어 있다. MIT의 경제학자 오터(David H. Autor)에 따르면, 인간이 보유한 숙련이나 교육의 수준이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가능성을 의미 있게 알려주지는 않는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 잣대는 ‘규격화된 업무(routine task)’인지의 여부이다. 자동화가 진전되면서 인지노동이든 육체노동이든 간에 규격화된 업무에 대한 수요가 빠르게 감소한다는 것이다.
규격화되지 않은 업무는 암묵지(tacit knowledge)에 의존한다고 볼 수 있다. 암묵지는 명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어떤 일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일련의 노하우에 해당한다. 암묵지에 대비되는 개념은 형식지(formal knowledge)인데, 그것은 문서나 매뉴얼을 통해 외부적으로 표출되는 성격을 띠고 있다. 이를 인공지능에 적용해 보면, 인공지능이 형식지는 잘 수행하지만 인간의 암묵지를 대신하기는 어렵다는 논변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인간의 암묵지 중에 인공지능으로 대체하기 어려운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인간 특유의 능력으로 창의적 능력과 정서적 능력을 들고 있지만, 이미 몇몇 인공지능은 창의성이나 정서를 가진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문제는 창의성이나 정서의 성격이다. 창의적 능력은 문제제기 능력과 문제해결 능력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인공지능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에서는 인간에 필적하거나 인간을 넘어설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 창의적인 문제를 제기하거나 정의하는 능력은 여전히 인간의 영역으로 남을 것이다. 또한 인공지능은 여러 형태로 인간과 친밀하게 교류하기 시작했지만, 인공지능의 정서적 능력은 친교에 그치는 것이지 결속의 수준으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특별한 요구를 하지 않은 채 인간과 교제하고 있을 뿐이며, 인간처럼 요구를 주고받으면서 서로 타협하고 책임을 공유하는 존재가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총체적 판단 능력에도 주목해야 한다. 인공지능도 일종의 판단을 하는 존재이며, 인공지능의 판단은 중요한 의사결정의 기초로 작용한다. 가령 인공지능 변호사가 의뢰인에게 제공한 자문이나 인공지능 의사가 환자에게 내린 진단은 인간의 의사결정을 제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의 판단은 부분적인 차원에 국한될 가능성이 높다. 인공지능은 다양한 데이터를 활용하여 콘텐츠를 생산하지만 고객의 사연을 감안하여 그 맥락을 이해하기는 역부족이다. 또한 인간은 우발적 상황까지 감안하여 판단을 내릴 수 있지만 인공지능에게 이러한 능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인공지능이 발전할수록 인간 특유의 업무나 능력의 범위는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의 성능이 계속 향상된다 하더라도 창의적 문제제기 능력, 정서적 결속 능력, 총체적 판단 능력 등은 오랫동안 인간의 영역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연구와 교육도 이러한 능력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 과정에서는 새로운 시장이 개척될 것이고 기존에 없던 일자리도 창출될 것이다.
[필자 소개]
서울대학교에서 무기재료공학과를 졸업한 후 과학기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산업기술평가원과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을 거쳐 2006년부터 부산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에는 <한 권으로 보는 인물과학사>, <사람의 역사, 기술의 역사>, <한국의 산업화와 기술발전> 등이 있다.
2024-01-05(금) 16:45:34, 
63211
이전글 :
운영자 토론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