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꿈꾸는 죽음5 - 이렇게 떠나고 싶다1 김영국  (Homepage) 2022-11-18(금) 08:13:04, 43939

소리 없이 미끄러져 나가게 해주십시오. 부드러움의 열쇠로 자물쇠를 열고 속삭임으로 영혼의 문을 열어주십시오.                -월트 휘트먼 <마지막 기도>에서 편안하게 떠나고 싶다. 이제 70대 후반이니 살 만큼 살았다. 언제든 좋다. 편안하게만 떠나고 싶다. 지인의 아버지는 공중목욕탕에서 돌아가셨다. 어느 정치인의 장인은 산책 중에 돌아가셨다. 전통적으로 말하면 객사고 횡사다. 가족으로선 많이 황망하고 안타까웠을 것이다. 내놓고 길상이라 말할 순 없어도, 나는 고인들이 죽음 복을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어른들이 입에 달고 하시던 말씀, 자는 잠에 가는 것보다야 못 하겠지만 나는 그분들의 죽음이 부럽다. 아버지는 60대에 돌아가셨다. 119를 부를 경황도 없이 어머니와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고향집에서 돌아가셨다. 걱정했던 폐암 말기의 고통을 겪지 않고, 암인 줄도 모르신 채 일상생활을 하다가 가셨다. 너무 이른 연세에 돌아가셔 안타까워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좋은 죽음의 첫 번째 조건은 편안함이기 때문이다. 아프지 않아야 편안하다. 고통을 견뎌낼 자신이 없다. 장기이식이라는 큰 수술을 겪었지만 다행히 견디기 힘든 통증은 경험하지 않았다. 이웃 병실에서 간헐적으로 들려오던 단말마 같은 비명소리는 소름을 돋게 했다. 치통도 앓아보고 요로결석으로 구급차를 타보기도 했다. 그런 고통이 시한도 없이 계속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선배 선생님은 위암 진단을 받고 내과의사인 아들에게 아프지 않고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편안하게 가셨다. 어느 해던가 각국의 죽음의 질을 조사했는데 영국이 1위였고 우리는 하위권이었다. 영국이 진통제 그것도 마약성 진통제를 많이 사용한 데 비해, 우리는 항암제를 유난히 많이 썼다는 분석이 있었다. 나도 저 선배 선생님처럼 내성 걱정하지 말고 진통제 많이 써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오래 끌지 않아야 편안하다. 이삼사二三死까진 바랄 수 없어도 일 년은 넘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가 김훈이 말한 죽음은 한 마디로 오래 끌지 말고 가자는 거다. ‘돈 들이지 말고 죽자. 건강보험재정 축내지 말고 죽자. 주변 사람들 힘들게 하지 말고 가자. 질척거리지 말고 가자.’ 2년 전, 내 또래 두 할머니의 얘기다. 아침에 남편이 일어나보니 평소와 달리 주방이 조용했다. 아내 방에 가보니 아내가 숨을 쉬지 않았다. 또 다른 남편은 새벽에 아내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구급차를 불렀다. 응급실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렇게 살아난 할머니는 지금까지 병원에 누워계신다. 앞의 남편과 자식들은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앞의 할머니처럼 가고 싶다. 가족들의 가벼운 아쉬움을 뒤로 하고, 산수유 꽃잎처럼 소리 소문 없이 지고 싶다. 가족이 힘들지 않아야 편안하다. ‘장병長病 끝에 효자 없다’는 속담은 진실이다. 요즘은 옛날과 달리 자식들이 다 직장에 다닌다. 퇴근 후나 주말이 직장인에게 어떤 시간인지 알고 있지 않은가. 하느라고 해도 자식 본인에게는 언제나 부족하다. 잠시 한가하다가도, 동료와 담소를 나누다가도 흠칫 내가 이럴 처지인가 자책하고 찜찜해하기 마련이다. 그 기간이 길어지면 자기도 모르게 자식으로서 차마 못 할 생각이 불쑥불쑥 들 수도 있다. 그러고는 또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 그리고 비용도 짐이다. 간병비가 장난이 아니다.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셨을 때 단독 간병인을 불러야 할 경우가 있었다. 하루 7만원이었다. 지금은 그 배도 넘었다. 몸과 마음도 힘들게 하면서 경제적 짐까지 지운다면 내가 편안할 수가 없다. 그건 부모가 할 짓이 못 된다. 제발 그러지 않고 갔으면 좋겠다. 짐이 되지 않으려고 나름으로 애써온 생전의 내 모습 흩트리지 않고, 노을이 스러지듯 가뭇없이 지워지고 싶다. 최소한의 위신을 지킬 수 있어야 편안하다. 파킨슨병을 15년째 앓고 있는 정신과 의사 김혜남은 ‘유쾌한 짐’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유쾌한 짐’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불쾌한 짐’은 안 됐으면 좋겠다. 용변은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정신 줄을 놓아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엉뚱한 행동을 하여 가족들을 당황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통증을 이기지 못하여 문병 온 가족들 앞에서 약해 빠진 언행 하지 않고 갔으면 좋겠다. ‘영국 신사’의 체통까진 언감생심이고 그냥 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성은 잃지 않고 눈을 감았으면 좋겠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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