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 없는 집' 김영국  (Homepage) 2019-12-22(일) 20:17:43, 8809

수영동 한 음식점 간판이 눈길을 끈다. ‘간판 없는 집’이라는 간판이 그것이다.  이런 엉터리없는 간판을 보고도 손님이 찾아올까. 그냥 웃으며 지나쳤는데 그 집이 수영역 가는 길이라 가끔 보게 된다. 대체 무슨 뜻으로 이런 간판을 달아놓았을까. 술을 끊은 지 오래라 일부러 들어가 주인장한테 정색하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 간판이 그냥 웃어넘길 말장난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는 음성과 의미가 결합되어 특정 사물이나 개념을 가리킨다. 그 의미가 지시하는 대상의 실체와 동떨어지거나 상반된다면 그 언어는 사람을 혼란스럽게 한다. 간판을 두 개나 달고 있는 이 집과 간판의 내용은 분명히 상반된다. 그래서 이 집과 간판은 엉터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언어가 음성과 의미의 결합체라는 전제에 문제가 있었다. 가령 몸짓언어는 음성 없이도 의사전달이 가능하다. 반대로 의미가 없는 언어도 있다. 고유명사는 대부분 음성만으로 대상과 연결된다. 이를테면 내 이름은 한자로 길 영과 나라 국이다. 선친께서 어떤 의미를 두셨는지 몰라도 누가 내 이름을 부르며 그 뜻을 생각하겠는가. 나마저도 내 이름의 뜻을 의식하지 않고 산다. 그러니까 나의 이름 ‘영국’은 음성일 뿐이고 의미는 없다고 봐야 한다. 우리 선생님들은 수없이 보아왔다. ‘슬기’라는 학생이 별로 슬기롭지 못하고, ‘선희(善姬)’가 그다지 착하지 않고, 겁쟁이 ‘용건(勇健)’이가 있었다는 것을. 그러면서도 선생님들은 이름 가지고 문제 삼지 않았다. 비단 사람 이름만 그런 것이 아니다. 미국(美國)이라는 이름 때문에 그 나라 그 국민이 아름다울 것이라 예상하지 않는다. 스페인, 필리핀의 어원이나 뜻을 모르고도 그 나라는 안다. 중앙고 중앙여고 중앙여중 가운데 어느 학교가 진짜 중앙에 있는지도 따지지 않는다. 서면에 대서양횟집이 있고, 수영에 북경반점이 있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젊은 아낙만 있는 할매복국집에서 생복을 의심하지 않고 비싼 가격으로 사 먹는다. 그 이름들은 그냥 음성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간판 없는 집’이라는 간판을 버젓이 걸어놓은 저 음식점은 엉터리일 것이라는 예단은 근거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저 간판으로 이름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허황한 간판 따위에 현혹되지 말라고 일깨워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저런 간판을 내 건 주인장은 의외로 언어학은 물론 ‘낯설게 하기’ 광고 기법까지 터득한 고수일지 모른다. 행여 그 집에 술 드시러 가서 취한 김에 주인장한테 간판 가지고 시비 걸지 마시라. 어설프게 덤볐다가 한참 동안 무미한 언어학 강의 듣느라 술 다 깨고 나오시는 불상사를 겪을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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