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혈액형도 모르는 기...... 김영국  (Homepage) 2018-07-09(월) 16:53:38, 2264

나는 B형이었다. A형인 것보다는 낫지만 O형이었으면 했다. O형이면 지금보다 용감하고 씩씩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자랐다. 그러다가 ‘B형 남자’ 경계령이 발효되고 나서는 아내로부터 우범자 취급을 당하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내게 바람기가 솔찬히 숨어있고 이기적인 면도 다분한 것 같았다. 배우 이동건을 보며 젊은 시절 나를 닮았다고 망언한 적도 있어(행여 밖에서 발설할까 걱정을 들었지만 ㅎㅎ) 나에 대한 가족들의 시선이 더 따가웠다. 그런데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입원한 병원의 간호사가 어느 날 내게 혈액형을 물었다. 무슨 생뚱맞은 질문인가 하는 표정으로 B형이라고 했더니 웃으며 O형이라고 정정해주었다. 매일 새벽 피를 뽑아 체크를 하던 중 내가 적어낸 혈액형과 검사 결과가 달라 고지해준 것이었다. 내 혈액형이 B형이 아니고 O형이라니! 한 번도, 조금도 의심해보지 않았던 내 혈액형이 그게 아니라니. 모든 문서에 의심 없이 적고 심지어는 군 인식표에까지도 그 혈액형을 찍어 목에 걸고 다녔다. 만약 야전에서 내가 긴급 수혈할 일이 있었다면 나는 그냥 죽었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죽음의 문턱에서 기사회생하였기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저승의 면접관 앞에서 또 얼마나 큰 망신을 당할 뻔했는가. 대체 내 혈액형을 내가 언제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까마득하여 아리송하다.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학생들의 피를 유리판 위에 뽑아놓고 어떻게 어떻게 처리하여 개개인의 혈액형을 불러주신 것 같다. 그때 혈액형별 성격의 특징도 얘기해주셨다. A형과 B형 남자는 기가 죽은 반면 O형 남자는 득의만면하고, AB형은 천재 아니면 바보라는 바람에 졸지에 바보 취급을 당했던 기억이 아슴히 떠오른다. 그 이후로 혈액형을 검사할 기회가 없었고, 굳이 피를 뽑아가며 확인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내 혈액형에 대한 콤플렉스도 숙명처럼 안고 살아왔다. 아, 지식이 이렇게도 생성되고 전달되고 각인될 수 있는 거구나. 그런 지식에 근거하여 생각과 믿음이 형성되는 것이기도 하고. 과연 나는 나를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내 머릿속의 지식 가운데 이런 식으로 축적된 엉터리가 얼마나 될까. 내가 소심한 것은 O형이 아니기 때문이고, 삿된 마음이 이따금 스멀거리는 것도 그놈의 피 때문이라 자책했던,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이나 믿음이 내게 또 얼마나 더 있을까.  그리고 아, 이렇게 얻은 지식, 이렇게 굳어진 생각으로 선생이랍시고 평생 동안 학생들을 가르쳐왔단 말인가. 문득 고향의 전설이 생각난다. 개가 교미하고 있는 것을 구경하고 있던 애들이 마침 지나가는 면장님에게 개가 왜 저러냐고 물었다. 민망한 광경을 일부러 외면하고 가던 면장님이 개가 장난치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걸 들은 어떤 어른이 피식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XX도 모르는 기 면장질 한다고 쯧쯧.”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 동네 어른들은, 깜냥도 안 되는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올라 껍죽대는 꼴을 보면 으레 이렇게 말하며 비웃었다. “XX도 모르는 기 OO질 한다고 쯧쯧.” 그 어른들이 지금의 나를 보셨다면 필시 이렇게 탄식하셨을 것이다. “지 혈액형도 모르는 기 선생질 한다고 쯧쯧.”

로그인을 하셔야 코멘트(덧글)을 쓰실 수 있습니다.

이전글 :	토요토미 히데요리
다음글 :	아이 캔 스피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