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 예찬 김영국  (Homepage) 2018-05-29(화) 18:05:49, 2452

‘늙다’와 ‘낡다’는 뜻은 겹치지만 쓰임은 다르다. 세월 속에 생물은 늙게 되고, 무생물은 낡게 된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세월에 흠집이 나고, 때가 묻고, 마모되어가다가 결국 사라진다. 그러니까 세월의 흔적은 소멸이 그만큼 가까워졌음 의미한다. 그걸 좋아할 리가 없다. 그런데 그 흔적이 오히려 좋은 건 뭐 없을까. 누군가 그랬다. 늙어서 좋은 것은 호박과 도사밖에 없다고. 과연 그럴까. 수확하여 오래 되어 좋은 것이 호박뿐일까. 감은 홍시가 맛있고 그래서 값도 비싸다. 곶감은 해가 바뀌어도 제상의 로열박스를 차지한다. 어디 그뿐인가. 바나나는 껍질에 검버섯이 군데군데 피어야 비로소 맛이 있고 영양가도 높다. 후숙 과일은 다 그렇다.   물건도 마찬가지다. 질이 잘 난 가구나 장신구는 우아하다. 오래되면 요강도 골동품이 된다.  많이 오래된 것은 깨진 그릇이라도 박물관에 모셔져 나라의 보배로 대접받는다. 요즘 젊은이들이 낡은 것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빈티지의 유행이 그것이다. ‘빈티지’의 ‘빈’이 ‘가난할 빈’인 줄 알았다. ‘된장녀’ ‘금수저’로 비칠까봐 일부러 가난한 티를 내는 치장을 일컫는 신조어인 줄 알았다. 그게 아니고 ‘낡고 오래 된 것’을 뜻하는 외래어였다. 요즘 젊은이들의 청바지는 다 몇 십 년, 아니 서부 개척 시대 존 웨인이 입던 거 아닌가 할 정도로 낡아있다. 이런 현상이 사람에게도 확대되어, 늙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그런 시대가 도래할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동방예의지국의 기특한 미덕이었던 경로가 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혐로嫌老로 바뀌는 징조가 속속 나타나고 있다. 때를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다운 법인데 꾸역꾸역 오래 살아 이런저런 민폐를 끼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너흰 늙어봤나. 우린 젊어봤다.” 또는 “젊음이 너희들의 노력으로 얻은 상훈이 아니듯, 늙음 또한 우리들의 잘못으로 받은 형벌이 아니다.”라고 우겨본들 귀 기울여주는 사람은 없다. 과연 늙어서 좋은 것은 없는 것일까. 두리번거리다가 다산 정약용의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를 만났다. 다산은 늙어서 얻게 된 유쾌한 일을 무려 여섯 가지나 열거하고 있었다. 그 속에  머리카락과 치아가 다 빠져버린 것이 들어있어 놀랐다. 머리카락이 없으니 상투 등 머리 매만질 일이 없어졌고, 치아가 없으니 지긋지긋한 치통에서 해방되어 좋다고 했다. 정말 그 시대엔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치아가 반쯤 남아있을 때의 불편함과 침으로 치통을 다스리며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그때의 아픔이 전해지는 듯했다. 그 밖에  눈과 귀가 어두워지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포함되어있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작가 박경리와 박완서는 죽음을 앞두고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며 늙음을 예찬하였다. 작품 활동하느라, 개인과 시대의 불행을 겪어내느라 내내 힘들게 살다가, 늙어서 비로소 누리는 편안함이 더없이 좋았나 보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렇게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박경리 나이가 드니 마음 놓고 고무줄 바지를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나 편한 대로 헐렁하게 살 수 있어서 좋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할 수 있어 좋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좋은데 젊음과 바꾸겠는가.--박완서 퇴임하고 큰손주 초등 1,2학년 때 하교 후를 돌본 적이 있었다. 이 녀석이 숙제를 하다가, 빈둥거리는 나를 보고 “할아버지는 좋겠다.”고 부러워했다. 자기 방, 자기 책상, 피둥피둥 살이 오른 모습을 보며 참 세상 좋아졌다고 생각하던 중이라 ‘요놈 봐라.’ 싶었다. “그으래? 할아버지가 니보다 좋은 기 뭐가 있는데?”  미리 준비해둔 듯 거침없이 나열했다. “숙제 안 해도 되고, 학원 안 가도 되고, TV 맘대로 봐도 되고, 늦잠 자도 되고, 야단치는 사람 없고,.......” 과연 그럴 만하구나 싶었다. 거꾸로 손주가 나보다 좋은 기 뭐가 있는지는 몇 가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 무렵 유럽의 한 연구팀이 생애 행복지수를 발표했다. 놀랍게도 75 세의 행복지수가 가장 높았다. 손주놈이 내 얼굴에 담긴 행복의 기미를 눈치 챈 게 들림 없었다. 이제 그 75 세를 목전에 두고 늙어서 좋아진 게 뭐가 있을까를 생각해본다. 무엇보다 여유로워진 것이 좋다. 시간과 일에 쫓기지 않아 꿈만 같던 ‘유유자적’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좀 뻔뻔해진 것 같다. 남의 시선, 평판 따위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싫은 일, 불편한 자리는 뻔뻔하게 거절하거나 사양한다. 그러니 스트레스도 적고 편안해졌다. 게다가 나도 모르게 많은 걸 내려놓은 것 같다. 심지어는 생에 대한 집착이랄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 많이 가벼워졌다. 어깨를 누르던 짐을 벗어놓은 듯 홀가분하다. 그리고 육신도 나를 여러모로 편하게 해준다. 머리카락 손발톱이 더디 자라는 것도 고맙다. 한 달에 한 번 가던 이발소를 이제 거의 두 달까지 버틸 수 있다. 비듬도 없어져 머리 감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발 냄새 기억도 까마득하다.. 퇴근해오면 집사람이 욕실부터 가라고 성화였는데 그 악취가 언젠가부터 사라졌다. 감기가 뜸해진 것도 늙음과 관련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라에서도 세심하게 구석구석 배려해준다. 연금도 주고, 국립공원, 영화관, 교통비, 통신비, 의료비 등 무료 내지 할인 혜택이 수두룩하다. 내가 젊었을 때, 연로한 선배들이 팔팔한 나를 부러워하는 줄 알았다. 머리 허연 70대 노인들을 보면 저 나이에 저렇게 사는 게 생존 외에 무슨 의미나 재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도 했다. 대단한 착각이었다. ‘10 년만 젊었으면.....’ 이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정말이지 젊음이 부럽지 않다. 크게 기쁜 일도, 짜드라 즐거운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 편안하고 여유롭고 홀가분한 늙음이 나는 좋다. 젊은이들이여, 늙음을 걱정하지 마시게. 두려워하지도 마시게. 행여 연민의 시선은 거두어주시게. 늙어보시라. 그러면 지금의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네. 기대하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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