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담임선생님2 김영국  (Homepage) 2018-05-09(수) 16:02:28, 2239

손주의 작문 노트를 보다가 신선한 충격을 두 번 받았다. 하나는 손주를 재발견한 것이다. 이 녀석은 대체 저 속에 뭐가 들어있을까 궁금할 정도로 말수가 적고 행동도 가만가만 조용한 편이었다. 누굴 닮아 그런지는 짐작이 가지만, 그래도 머슴아 자식이 좀 더 활발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다가도, 입가를 떠나지 않는 서산 마애불의 미소를 보며 아쉬움을 지우곤 했다. 주제를 가리지 않고 거침없이 써내려간 작문을 보며 ‘야! 이놈 봐라.’를 연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속에 아주 딴 놈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소심하고 어눌한 것이 아니었다. 조리 있게 생각을 펼치고 당당하게 주장을 내세웠다. 때론 터무니없는 과장으로 너스레도 떨고, 은근슬쩍 뽐도 내는 품이 활달한 장부의 기상을 엿보게 했다. 시에도 재치가 보였고 만화는 재미있었다. 독후감에도 자기 생각이 담겨있었다. 대체 얘가 어디로 어떻게 뻗어갈지 미래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런 애를 부모 욕심 내세워 섣불리 의대 지망생으로 한정 지워서는 안 된다고 사위와 딸한테 신신당부했다. 두 번째 충격은 담임선생님한테 받았다. 이렇게 부지런한 선생님이 계시다니. 매주 주제를 주고 작문을 하게 하여 일일이 피드백을 하고 있었다. 다 읽고 하나하나 댓글을 달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고, 이걸 매주 하려면 어느 정도의 의욕과 신념이 있어야 가능할까. 이것만으로도 우리 교육계의 국보급 보배가 아닐 수 없다. 이 시대 학생들에게 무엇을 길러주어야 할지를 고민하는 깨어있는 선생님임에 틀림없다. 선생님은 이 작문 교육을 통하여 학생들의 사고력, 창의력, 표현력 그리고 각자의 개성을 부추기고 있었다. 지금의 주입식 교육이 시대에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고군분투하고 계신 것이다. 선생님의 육필이 담긴 글을 매주 돌려받는 학생들은 자존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한 줄로 세워 순위를 매기는 지금의 교육은 학생들의 자존감을 박탈하는 제도이다. 이 학급의 학생들은  일 년 동안 선생님의 관심과 사랑을 확인하면서 나도 소중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체화할 것이다. 그렇게 얻은 자존감은 생의 결정적 순간에 자신을 지탱하는 든든한 기둥이 될 것이다. 선생님은 교사의 직업병인 지적질 충동을 잘 억누르고 있다. 아래의 손주 글은 주제를 조금 벗어나있다. 성별이 바뀌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무엇을 해보겠는지를 써보라는 것인데, 손주는 남녀 심리를 비교하다가 ‘어쨌든 여자가 되기 싫다.’고 글을 맺었다. 다른 글에도 이런 논점 일탈이 보였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개의치 않고 써놓은 글만 칭찬하고 있다. 맞춤법도 전혀 건들이지 않고 재미있거나 주목할 만한 표현에 밑줄을 긋고 이모콘을 달아놓았을 뿐이다. 자잘한 지적질이 학생들을 얼마나 주눅 들게 하는지를 잘 알고 계신 것이다. 선생님은 초등학교 4학년이 재미있게 생각하고 그래서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주제를 많이 준비해놓고 있는 것 같다. 이래야 교직을 전문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몇 개를 소개한다. 1.내가 되고 싶은 동물과 그 이유 2. 화장실에서 똥을 눴는데 휴지가 없다면 3. 나쁜 일인데 하고 싶은 일은 4. 선생님은 안 하면서 나한테 시키는 것 5. 남녀 성별이 바뀐다면 6. 다섯 쌍둥이를 낳았다면 붙이고 싶은 이름과 그 이유는 7. 선생님 몰래 수업시간에 과자 먹는 법........ 아, 키팅 선생님이 우리 곁에 계시다니. 우리 손주가 그 선생님을 만나다니. 이 녀석이 전생에 나라를 구했음이 확실하다.^^ 이 학교 다니는 두 손주도 이분 선생님을 담임선생님으로 만날 수는 없을까. 선생님이 내내 건강하시어 좋은 교육 오래오래 펼쳐주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모든 초등학생이 6 년 중 단 1 년만이라도 이런 선생님을 담임선생님으로 만날 수 있을 만큼 키팅 선생님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손주 글과 선생님의 댓글 예시 주제: 나는11년 동안 엄청난 여자와 남자에 대해서 연구해왔다. 그런데 딱 4학년이 되어 선생님이 나에게 우리 모두에게 시키셨다. 뭐 그래도 정확한 사실은 아니라서 아무튼 여자들에게는 엄청 복잡한 법칙이 숨어있다. 그것들은 수억 개가 넘는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자의 생김새다. 지금까지 내 짝지들은 아빠 말고 다 별로라고 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여자들은 자기반에 잘생긴 애가 있다고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 같다. 2번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여자들은 남자들을 유치하게 생각한다. 3번째로 중요한 것은 어른들의 말을 계속 들어온 건데 여자들은 남자애들을 좋아하면 괴롭힐 가능성이 99%다. 그리고 남자들의 법칙은 단순하다. 오직 여자아이들을 괴롭히는 걸 좋아하고 쉬는 시간이 되면 무조건 무리로 뭉쳐 다니며 논다. 남자들은 지금보다 조금 더 크면 소녀 같은 스타일보다 운동 잘하는 털털한 여자를 좋아할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결론은 난 여자가 되기 싫다. 선생님 댓글 --00아 이거는 어디 과학 잡지에 실어도 되겠다.ㅋㅋㅋ 4학년이 이토록 아이들의 심리를 잘 알다니 정말 대단해. 나의 심리도 00이에게 다 들킨 거 아닐까. (대체 이 칭찬의 보약은 그 값어치가 얼마나 될까. 효능의 강도와 지속성은 도저히 돈으로 매길 수가 없을 것 같다.)

로그인을 하셔야 코멘트(덧글)을 쓰실 수 있습니다.

이전글 :	늙음 예찬
다음글 :	대통령의 말과 백년대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