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도를 아십니까 김영국  (Homepage) 2017-11-07(화) 10:30:24, 2484

전작 '내비도'를 공모 취지에 맞춰 개작하여 응모한 글입니다. 말석으로 입상하긴 했는데 여러모로 겸연쩍습니다. 일흔에 능참봉이라더니 나이 70을 넘겨 난생 처음으로 응모한 것도 그렇고, 내 내면과 동떨어진 글의 내용도 그렇습니다. 그런 만용이나마 부려본 것도 전작(No.200)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육사랑' 덕분이었습니다. 월간 공무원연금(2017년 10월호)에 실린 글이라 읽은 분도 계실 것 같아 구차한 변명을 곁들여 싣습니다. 너그럽게 봐 주시길..... ****************************************************************************** 도(道)를 묻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웃어넘겼는데 늘그막에 도 하나가 내 삶의 화두가 되었다. 도 같지 않은 도, 천하 쉬울 것 같으면서도 좀체 도달하기 어려운 도 ― ‘내비도’가 그것이다. 내비도의 개념은 단순하다. 이름 그대로 내비 놔두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어떤 짓을 해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도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신경 쓰지 않고, 참견하지 않으면 된다. 노인이 가야 할 길이다. 그러라고 나이가 들면서 시력도 떨어지고 귀도 멀어가고 말도 어눌해지고 기력도 사그라져가는 것일 터이다. 그 순리에 따라 살아야 본인이 편하고 주위 사람도 편하고 세상도 편할 것이다. 퇴임을 앞두고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지갑은 열고 입은 닫으라는 것이었다. 지갑이 가벼운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입을 다무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내비도의 첫걸음이기도 하다. 한발 앞서 은퇴한 교수가 후배에게 말을 줄이라는 충고를 한 시간이나 했다던가. 일일이 지적하고 훈계하고 가르치며 살아온 내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일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은퇴를 하고 나니 평소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것이 무더기로 눈과 귀를 자극했다. 그럴 때마다 입이 근질거렸다. 평생 입으로 살아온 사람이 그걸 참는다는 것은 고문이나 진배없었다.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았다. 큰손주가 구세주였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그를 돌보게 된 것이다. 그래 한번 제대로 키워보자. 이 녀석은 언어 습득기를 외국에서 보냈다. 언어능력에 빈자리가 클 것이라 판단하고 읽기와 쓰기에 집중했다. 바닥을 헤매던 받아쓰기에서 잇달아 100점을 받아왔다. 자신감을 얻은 손주는 다른 과목에서도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아들 딸 내외들이 나의 위력(?)에 탄복했다. 긴가민가하던 아내도 나의 유통기한이 아직 다하지 않았음을 인정해주었다. (내게서 독립한 지 7년이 지난 손자가 지금도 승승장구하고 있는 걸로 보아, 그때 그 녀석의 성취는 내 능력과 무관함이 드러났다.^^) 가족의 인정을 받은 나는 거칠 것이 없었다. 손주들의 교육부터 입질을 시작했다. 학원보다 학습지가 낫다, 책을 많이 읽혀라 등 눈에 보이는 대로 간섭했다. 초등학교 교사인 딸과 며느리 앞에서도 거리낌이 없었다. 고분고분 들어주는 그들의 태도에 고무된 나는 교육의 벽을 넘어 생활 전반을 참견하기 시작했다. 내 관심은 어느새 가정의 담을 넘고 있었다. 아파트가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주차장, 분리수거 등 바로잡아야 할 것이 구석구석에 즐비했다. 집 앞의 공원, 둘레길 굽이마다 눈에 거슬리는 것이 수두룩했다. 전화를 걸거나 홈페이지를 찾아 글을 올렸다. 모임에 가면 관심사는 나라로 확대되고 술 한 잔이 걸쳐지면 국제정세까지 도마에 올렸다. 열을 내뿜는 동안 내가 아직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끝 모르고 치닫던 내 기상에 힘이 빠지고 있었다. 내 훈수를 듣는 가족들의 태도가 시큰둥해지고, 각처에 보낸 건의에는 의례적인 답변만 돌아왔다. 존재감을 부풀려주던 친구들과의 거대담론도 점점 공허해졌다. 그런데 잦아든 기상의 자리에 역정과 짜증이 차오르고 있는 게 아닌가. 아, 이건 아니다. 내가 꿈꾼 노년은 이런 게 아니었다. 은퇴 초심을 되짚어가던 중 17세기 한 수녀님의 기도문을 만났다.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늙어가고 있고 언젠가는 정말로 늙어버릴 것을 저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저로 하여금 말 많은 늙은이가 되지 않게 하시고 특히 아무 때나 무엇에나 한 마디 해야 한다고 나서는 치명적인 버릇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 모든 사람의 삶을 바로잡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 하략 ~ 수녀님을 진저리치게 한 늙은이는 누구일까. 필시 수도원의 선배 수녀님일 것이다. 평생 도 닦으며 살아온 늙은 수녀님들도 잔소리의 충동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나 같은 범인이 예사로이 결심한다고 될 일이 아님이 분명하다. 팽개쳐두었던 내비도를 다시 꺼내들었다. 우선 입버릇처럼 튀어나오던 “그럴 수 있나?”를 “그럴 수도 있지!”로 바꾸는 연습부터 다시 시작했다. 세상사를 날씨 대하듯 바라보자고 다짐했다. 추우면 옷 하나 더 입고, 더우면 한 겹 벗고, 비오면 우산 꺼내들듯 시비 따지지 말고 그러려니 하며 살아보자고 마음먹었다. 한 일 년 지나니 시나브로 말수가 줄어들고 목소리도 낮아졌다. 그런데도 마음은 조금씩 편안해지고 있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것이다. ‘소이부답(笑而不答)’의 경지까지는 가야 할 길이 까마득하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래도 이왕 접어든 길, 가는 데까지 가보려 한다. ‘진짜 어른’이야 언감생심이겠지만, 적어도 ‘주책’ ‘망령’, 이런 말은 안 들으며 늙고 싶다. 내비도가 그 길이라고 굳게 믿으며 그 길을 따라 뚜벅뚜벅 가고 있다. 수상소감 님이 주신 생의 시간에 이런 기쁨을 누립니다. 남은 생명 물려주시고 떠나가신 생면부지의 님에게 이 영광을 드립니다. 누 되지 않게 살겠습니다. 편히 쉬소서. 이전에 썼던 글 ☞ `내비도` 다시 보기(클릭)

김은숙		가끔 접하게 되는 교장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항상 공감백배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저도 내비도에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2017-11-08 10:33:30
김영국		공감하셨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공감'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고 있는 요즘입니다 감기 조심하십시오	2017-11-09 14: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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