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의 추억 김영국  (Homepage) 2017-10-05(목) 09:49:31, 2466

* 사진출처 : 공공누리(http://www.kogl.or.kr) 우리 고향은 면사무소에서도 한참 떨어진 30여 가호의 작은 마을이었다. 어린 시절 책보를 등에 메고 아득한 방천길에서 바라본 우리 동네는 늘 아늑히 잠들어있었다. 바다를 앞에 두고 나지막한 산자락에 옹기종기 엎드린 모습은 벽에 걸린 그림처럼 아름답고 조용했다.   그런데 어느 해 겨울방학에 찾아간 고향 마을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들썩거리고 있었다. 끼리끼리 모여 밤새워 노름판을 벌이고 낮이면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술판을 벌이던 사람들이 전사처럼 눈에 불을 켜고 움직이고 있었다. 새마을운동이 그들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마을 단위 평가 결과에 따라 차등 지원되던 시멘트와 철근을 이웃마을보다 더 따오기 위해 그들은 모처럼 일심동체가 되어 머리를 맞대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었다. 평가대상은 크게 두 가지 ― 초가지붕을 없애는 일과 마을길을 넓히는 것이었다. 그 중 어려운 일은 길을 넓히는 것이었다. 마을의 역사와 함께 해온 고샅길은 집 아니면 전답과 접해 있었다. 이 난제의 돌파구는 뜻밖에도 진외가 할아버지가 열었다. 그 집 땅을 밟지 않고는 어디에도 갈 수 없다는 땅 부자 할아버지, 남 먼저 일어나 개똥 소똥을 주워 모으면서 마을이 쩌렁쩌렁하도록 호통을 치다가 낮이면 흰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외출하시던 그 무서운 자린고비 할아버지가 통 큰 양보를 하셨던 것이다. 그 할아버지 버금가는 자린고비로 통하던 아버지도 뼈아픈 결단을 하셨다. 헛간과 돼지우리 건물을 헐어내어 집터를 도로에 할애하고 집 앞 텃밭도 잘려 나갔다. 지지부진하던 사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추진위원회에서 줄을 그으면 다들 두말없이 수긍하며 땅을 내놓았다. 방학에 귀향할 때마다 변해가는 고향 마을을 확인하는 것은 기쁨이고 감격이었다. 마을 안길에 연해있던 도랑을 복개하여 포장을 하고 들쭉날쭉 돌담을 블록 담으로 바꾸고 나니 마을의 인물이 달라졌다. 초가지붕이 헐린 자리에 슬레이트가 얹히고 도색까지 하니 어디 사진에서나 보던 선진국의 농촌을 보는 듯했다. 논밭에 접근하는 길까지 확장 포장할 즈음 대대적인 농지 구획정리까지 시작되었다. 누군가는 이익을 보고 또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을 텐데 큰 다툼은 없었다고 했다. 새마을운동의 경험으로 주민 상호간 그리고 관(官)에 대한 믿음이 그만큼 두터워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마을의 역사를 모른다. 수백 년은 되었으리라. 그 몇 년 동안에 일어난 변화는 우리 마을 수백 년의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천지개벽이었다. 위에서 불도저로 밀어붙인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을 사람들의 뜻과 힘으로 이루어낸 혁명이었다. 사실 그때까지 나는 ‘자조’의 뜻을 잘 몰랐다. 자립 자주는 짐작이 되는데 ‘스스로 돕는다’는 말이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새마을운동을 지켜본 후에야 초등 때부터 들어왔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사람을 돕늗다.’는 말의 뜻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때 그 일에 참여했던 우리 동네 어른들은 생애 처음으로 당신들의 힘을 자각했을 것이다. 그 마을길에 경운기를 몰면서, 자녀들이 명절에 자가용을 집 앞까지 끌고 오는 걸 보면서, 그리고 논 가운데까지 트랙터와 콤바인이 들어가는 광경을 구경하면서 당신들이 그때 무슨 일을 했는지 깨달았을 것이다. 수천 년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던 지게를 골동품으로 전락시켜버린 그날의 역사(役事)를 저승에서도 자랑하고 계실 것이다. 싱가포르를 경유하여 인도네시아의 한 섬에 갔을 때 나는 느닷없이 새마을운동을 생각했다. 한 시간 남짓 배로 이동했을 뿐인데 두 나라 주민들의 삶은 하늘과 땅이었다. 수많은 섬을 고루 챙기긴 힘들 것이다. 섬 단위로 새마을운동을 벌여 결과에 따라 선택과 집중의 방법으로 지원을 한다면 주민들이 저렇게 나태하게 관광객에게 손이나 벌리며 살아가진 않을 텐데..... 그런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많은 나라 또는 마을에서 우리의 새마을운동을 배워가고 있는 모양이다. 작년까지 38개국에서 6만여 명이 연수를 받았고, 새마을 봉사단은 세계 각처에 나가 새마을운동을 가르치며 실천하고 있다고 한다. 봉사단에 힘입어 한 마을이 화려하게 변신하는 것을 직접 확인한 아프리카 르완다 대통령은 유엔 총회에서 새마을운동을 예찬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새마을’은 ‘태권도’ ‘김치’ 등과 같이 우리의 브랜드로 정착하여 세계로 뻗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새 정부에서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의 사업 명칭에서 ‘새마을’을 삭제하기로 했다고 한다. 후진국에 원조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더 의미가 클 것이다. 우리가 직접 경험하여 터득한 지식을 다른 나라에 우리의 이름으로 전수하여 속속 그 효과가 드러나는 판에 새 정부가 찬물을 끼얹는 형국이다. 북한의 ‘천리마운동’은 가치중립으로 서술하면서 ‘새마을운동’은 정권연장 수단으로 폄훼한 국사 교과서가 있더니 그들의 눈에 ‘새마을’도 적폐이고 청산의 대상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참으로 옹졸하고 유치한 사람들이다. 저승에 계신 그날의 주역들이 통곡할 일이다.

로그인을 하셔야 코멘트(덧글)을 쓰실 수 있습니다.

이전글 :	그거 있잖아
다음글 :	부장님 개그5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