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망 교육의 추억8-반짝이 김영국  (Homepage) 2017-03-07(화) 06:12:52, 2966

그때는 학교에 ‘반짝이’라는 은어가 있었다. 특정 선생님에게 반짝반짝 빛을 뿜는 여학생을 일컫는 말이었다. 내 개인적 경험을 두고 말하면 문현여고 재직하던 80년대 중반에는 그 광도가 일등별 정도였다면 90년대 초반 금정여고 시절에는 2~3등별로 그 촉광이 떨어지면서 현저히 성겨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남녀공학인 사대부고에 가니 아예 암흑천지였다. 물론 내 나이가 30대 후반에서 50대로 접어든 탓도 있겠지만 개인의 문제만이 아닌 것이 교무실에 만발하던 꽃병이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개방적인 사회 분위기. 젊어진 연예계 그리고 학교 불신 풍조 등이 주요 원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부산고에서 동래고로 내정되어 3학년 담임까지 약속해둔 계제에 느닷없이 신설 문현여고로 발령이 났다. 투덜거리며 부임했는데 그 학교 5년이 내 교직 생활 중 가장 신나는 기간이 되었다. 신났던 까닭은 여러 가지 있었지만 그 중 하나가 ‘반짝이’의 존재였다. 덤덤한 남학교 교실에 익숙한 내게 여고의 국어 교실은 차라리 신천지였다. 방실방실 초롱초롱, 교실이 아니라 꽃밭이었다. 게다가 리액션이 장난이 아니었다. 내가 이렇게 재미있는 선생님이었나, 내 유머 감각이 이 정도였나 놀랄 정도였다. 방송국의 방청객을 압도하는 열기 속에 유난히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를 여기저기에서 발견하고 한편으로 놀라고 한편으로 당황하고 또 한편으로 설레기도 했다. 그들의 활약은 곳곳에서 빛난다. 일단 교무실에 들어서면 책상 위의 꽃이 나를 반긴다. 그 꽃은 매일 바뀐다. 어떤 날은 나를 만나기 전에 쓰레기통 신세가 되는 꽃도 있었다. 수업에 들어가면 교탁에 음료수 캔이 놓여있다. 수업 중에 마시라고 채근들을 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교탁에 두고 오면 쪼르르 들고 따라온다. 대개는 반짝이 짝꿍이 들고 와 누구의 소행인지 넌지시 알려준다. 하루에 보충까지 5시간 수업이면 5개가 책상 위에 쌓인다. 보기가 민망해 옆 선생님께 드릴라치면 주위를 맴돌던 반짝이가 보고는 노골적으로 섭섭해한다. 할 수 없이  가져오는족족 서랍에 넣었다가 결국 우리 집 냉장고까지 가게 되었다. 뿐이 아니었다. 숙직 날을 용케 알아내어 저녁엔 반주와 함께 야식을 넣어주고 아침 일찍 김밥을 가져왔다. 내 숙직 파트너 선생님은 생일날보다 잘 먹었다고 치사를 하곤 했다. 생일 말이 나서 말이지 생일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 빠뜨리지 않고 선물을 챙겼다. 생각해보면 반짝이 노릇하는 데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으리라. 특히 생일이나 스승의 날에 마련한 선물은 일반 학생들의 그것과 확연히 달랐다. 넥타이 와이셔츠 남방 등을 한동안 내 돈으로 사지 않아도 장롱이 넘칠 지경이었다. 마음에 맞지 않아 안 입고 안 매면 그 짝꿍이 찾아와 누구가 사 드린 건 왜 안 입느냐고 닦달해 마지못해 입고 가기도 했다. 요즘 같으면 김영란법에 걸려 사표를 써야 할 수준이 다반사였다. 처음엔 부담스러워 기억나는 학생을 만나면 앞으로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곤 했지만 나중엔 그냥 그렇게 받았다. 사실 누가 무슨 선물을 했는지 거의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니 고맙다는 말조차 건넬 수가 없었다.  그저 한번 입어주고 혹 복도에서 만나면 알은체를 해주거나 소풍지에서 찐한 포즈로 사진 찍어주는 게 보답의 전부였다. 개중에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도 있었을 텐데 그런 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은근히 즐기기도 하고 은근히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참 민망한 일이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그 와중에 어떤 잡음도 생기지 않은 것이다. 내가 여학교에서 학생을 대할 때 늘 명심한 것은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의 원칙이었다. 민감한 시기여서 너무 가까이 해도, 갑자기 너무 멀리 해도 문제가 생긴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밀당’의 명수였던 셈이다. 나는 그들이 있어 학교생활이 즐거웠고 그들은 내가 있어 그 고단한 고3 시절을 재미있게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 그때를 되돌아보고 어떻게 생각할까를 상상해보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반짝이’라는 말에는 반짝반짝 빛난다는 뜻과 함께 또 그렇게 가뭇없이 사라진다는 뜻이 포함되어있다. 반짝거리다가 1년이 지나면 어김없이 스러진다. 졸업을 하고 첫 스승의 날에 으레 꽃을 들고 찾아온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그 광채는 이미 흔적도 없다. 이분이 정녕 그분이란 말인가 혼란스러워하는 눈빛이 완연했다. 관해난수(觀海難水)라 했던가. 남자라고는 가족 말고는 선생님뿐이었을 때와 대학에서 젊은 남자의 바다를 접하고 난 뒤가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그들은 나에게서 멀어져가고 나 또한 나를 둘러선 새 반짝이들에 빠져 그들을 잊어가는 것이었다. 얘들아, 이제 너네도 중년이 되었겠구나. 잘들 살고 있재? 받기만 하고 아무것도 주지 못했구나. 미안하고 민망하다. 그래도 그때, 너희가 있어 선생님은 많이 행복했단다. 지금은 그 추억으로 행복하고. 고맙다. 건강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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