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기억 - 오기와라 히로시 김민서  (Homepage) 2010-02-22(월) 22:23:10, 8150

‘기억’이란 단어는 흔히 ‘어제’라던가 ‘지난날’이라던가 과거형과 호응해서 쓰이는 말이 아니던가. 그런데 ‘내일’이라는 미래를 의미하는 단어와 함께 쓰인 이 모호하고 반어적인 제목을 보았을 때 참으로 묘한 인상을 받았다는 게 이 소설을 처음 대했을 때의 느낌이었다. 이 소설은 알츠하이머라는 진단을 받은 한 중년의 남자가 화자가 되어 완전한 투병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우리가 흔히 치매라고 부르는 알츠하이머를 본격적으로 다루거나, 부분적으로 묘사한 소설은 많이 보아 왔다. 그러나 대부분 병에 걸린 환자를 지켜보는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에 반해 이 작품은 환자 자신의 입장에서 쓰여 졌다는 점에서 우선 특색이 있었다. 기억이란 내가 ‘나’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란 점에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약속이며 하나의 존재방식이라고까지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지한 한 생명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본능과 학습으로 사는 법을 체득해 가는 게 인간이라면 그 기억을 잃어가는 이 병은 정말 치명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알츠하이머는 주변의 사소한 기억들을 지우고 차츰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들과 일들에 관한 기억을 지우며 그러다가 내가 내 자신임을 잊게 만드는데서 그치지 않고 드디어는 내 몸이 기억하는 식욕, 배설 등의 본능과 몸의 기능에 관계된 기억조차 잃게 함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잔인한 병인 것이다. 그래서 알츠하이머는 혼자 앓는 병이 아니란데서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고통이 등호를 이루는 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50세가 된 사이키는 광고대행사의 영업부장으로 부하직원들의 신망을 받으며 아직은 한창 일할 나이이다. 그런데 어느 날에서부터인가 기억력이 서서히 감퇴되어 간다. 처음엔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불면과 우울증 증세가 아닌가 추측하지만 결국 양명성 알츠하이머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이미 알츠하이머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경험한 바 있는 사이키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고통스럽다. 그리고 기억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메모와 일기쓰기에 필사적이다. 약물치료와 아내의 정성어린 보살핌, 자신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사이키는 결국 직장에서도 밀려나고 병세는 점점 깊어만 간다.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와중에도 자신의 간병과 사후에 홀로 남을 아내를 배려해 치매환자들을 위한 요양시설을 혼자 알아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요양시설의 부족과 환자에 대한 믿음직스럽지 못한 처후와 환경을 절감하게 된다. 그리고 곧 결혼과 출산을 앞두고 있는 딸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젊은 시절부터 취미로 해온 도예에 몰두하며 부부찻잔을 완성하는 일에 전념한다. 그러면서 자꾸만 머리 속에서 전구의 필라멘트처럼 툭툭 끊어지는 기억의 소멸을 겪어나간다. 그의 좌절과 분노, 수용과 극복의 과정이 가족에 대한 연민, 직장생활에 대한 애착과 함께 절실하게 그려져 있어서 읽는 내내 가슴이 짠했다. 결국 마지막 장에 와서는 꾹꾹 눌러 놓았던 눈물샘을 터트려 놓고야 말았다. 젊은 시절 가본 적이 있는 가마터를 찾아가는 장면이다. 다행히 기억은 그를 배반하지 않고 무사히 그 외진 산골의 가마터로 그를 이끌어 준다. 오고가는 길에서 그는 이미 병으로 유명을 달리한 도예를 같이 했던 친구를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아직은 갓난쟁이인, 어쩌면 자기 손녀의 미래의 모습일지도 모르는 소녀도 만난다. 그러나 아직은 어느 한 부분 명료한 그의 의식은 그것이 환상임을 알고 있다. 이제는 거의 쇠락해 버려 흔적으로 남은 가마터의 과거의 잔재 속에서 사이키는 아마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보았을 것이다. 그 곳에서 짐작컨대 치매를 앓고 있는 듯한 옛 가마터의 주인인 노인과 하룻밤을 보내며 무너져 내린 가마터를 임시로 복구하여 찻잔을 구워 완성시킨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내려온 산의 입구에서 한 여인을 만난다. 그녀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며 산길을 동행해 준다. 그의 안부를 걱정하던 아내가 그를 찾아온 것이지만 이제 그는 아내의 얼굴조차 잊어버리게 된 모양이다. 해가 기울어 가는 산길을 나란히 걷는 두 노부부의 뒷모습은 처절한 아름다움이다. 결코 해피엔딩을 기대할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앞으로의 험난한 투병의 과정에 그의 아내가 든든한 동행이 되어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게 한다. 예전에는 노인들에게서 발병하는 병으로 생각했던 치매가 요즘엔 훨씬 젊은 층에게서도 종종 발병하는 경우가 있어 그것을 ‘양면성 알츠하이머’ 도는 ‘초록치매’라고도 부른다. 어떤 병이나 가족들의 고통이 뒤따르지 않는 경우는 없을 테지만 특히 이 병은 예방과 치료에 있어서 환자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 이제는 우리 사회가 다 같이 고민해야할 문제가 아닐까. 우리 동네만 하더라도 노인요양병원이 설립된다는 사실에 대해 주민들이 상당히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고 들었다. 장애인시설이나 노인시설 같은 것들을 혐오시설로 오해하여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 게 아니라 오히려 편의시설이나 근린시설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게 왜 어려운 일인지 모르겠다. 나에게, 혹은 우리 가족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런 이기심은 버리게 될 터인데 말이다. 망각의 강이라는 ‘레테의 강’은 죽은 이들이나 건너는 강이다. 그 강의 언저리에 한쪽 발을 담그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알츠하이머 환자들의 숙명이 아닐까. 하지만 그들이 잃어버린 기억은 그가 살아온 시간 속에, 함께 지내온 사람들의 추억 속에 살아있는 것이어서 기억이 사라진다 해도 내 지난 날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구원의 목소리를 이 책 속에서 들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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