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 놈이 전화했노?" 최영도  (Homepage) 2015-06-16(화) 08:42:21, 6893

1980년대 후반 부산체육고등학교에 근무할 때 일이다. 그 때 나는 학생부 새마을계원으로서 환경 및 민방위교육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 해 전국체전이 끝나자마자 그동안 미루어왔던 교내 소방훈련을 실시하였다. 수업 중 화재가 발생하는 상황을 설정하여 메뉴얼에 따라 사이렌이 울리고, 서무실(현, 행정실)에서는 소방서에 화재신고를 하고, 학생들은 교내방송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화재진압 장비를 챙겨들고 현장으로 달려가는 학생과 수돗가에서부터 화재현장으로 열을 지어 물을 운반하고......... 그런데 며칠 뒤 실제로 교내에서 화재가 발생되었다. 화재를 가장 먼저 발견한 학생이 서무실로 뛰어들며 “불이야!"를 외쳤고, 다급해진 서무과장은 마이크를 켜고 “목공소 뒤에 불이 났다, 목공소 뒤에 불이 났다."를 몇 번 외친 후 방송이 나가고 있는 줄도 모른 채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소방서에 전화하면 안된다이, 119 에 전화 걸면 안된다!" 소화기를 챙겨들고 현장으로 달려가 보니 늦가을 마른 풀잎때문에 불이 삽시간에 번져 학생들이 운반하는 물통과 몇 대의 소화기는 코끼리 비스켓에 불과하였다. 이대로는 불을 끌 수가 없겠다고 느끼는 순간 저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다행이라고 느끼는 순간 서무과장의 화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언 놈이 전화했노?" 소방차가 도착하여 굵은 물줄기를 내뿜자마자 삽시간에 뒷뜰을 통째로 집어삼켜버릴 것 같던 불길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소방관들이 불길을 거의 다 잡아갈 때 쯤 서무과장은 현장에 모여있는 교직원들 틈새를 헤집고 다니면서 “누가 신고 했어요? 누가 신고했는지 몰라요?" 소방관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범인을 찾아 다니고 있었다. 그 때 이런 분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한 학교 옆 문방구 아저씨가 뒤늦게 현장에 도착하여 자기가 119에 빨리 신고했기 때문에 저 산으로까지 번져갈 수도 있었던 큰 불이 다행스럽게 진압될 수 있었다고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는 바람에 서무과장의 범인 색출 작업은 자연스렵게 끝이 났던 적이 있었다. 그 때 서무과장님은 왜 그렇게 했을까? 불이 번지는 것보다 화재 소식이 교육청에 알려지는 게 더 무서워서 그랬던 것 같다. 이번 메르스 확산 사태를 보고 있노라면 아직까지 우리 나라 공직 사회에는 30여년 전 부산체고 서무과장님 같은 분이 곳곳에서 맹활약 중이란 걸 증명하고 있는 것 같다. 초기에 국민에게 메르스 감염 사실만 정확하게 알렸어도 이렇게까지 번지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 사진 출처 - ☞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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