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합성에서 씨앗 독립까지, 우장춘 송성수  (Homepage) 2022-08-22(월) 09:12:55, 61173

이번 방학 때 열심히 써 본 글입니다. 읽어 보시고 코멘트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종의 합성에서 씨앗 독립까지, 우장춘 우장춘(禹長春, 1898～1959)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인물이다. 그에게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 육종학자, 한국 근대 농학의 아버지, 겨레의 농학자, 국보급 과학자 등과 같은 평가가 따르고 있다. 사실상 우장춘의 삶은 굴곡이 많고 매우 극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거나 존경을 표하고 있다. 그러나 우장춘에 대한 대중적 서사 중에는 과장되거나 잘못된 부분도 제법 있다. <그림 1> 한국의 씨앗 독립을 일군 세계적 육종학자, 우장춘 ▣ 편모슬하에서 자란 혼혈아 우장춘은 1898년에 일본 도쿄에서 우범선(禹範善)과 사카이 나카(酒井仲)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우장춘의 호적상 생일은 4월 9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4월 8일이다. 우범선은 자신의 아들이 당연히 한국에 돌아가 살게 될 것으로 생각하여 한국식 이름을 짓고 서울에 출생 신고를 했다. 우범선은 중인 출신의 개화파로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한국에서 부인과 딸을 두었는데,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망명을 갔다. 사카이 나카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던 중 우범선을 만나 결혼에 이르렀다. 혈통으로 볼 때 우장춘은 한국인과 일본인의 피를 함께 이어받은 혼혈아였던 셈이다. 우창춘이 5살이던 1903년에 우범선은 대한제국의 무관을 지냈던 고영근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다. 1904년에는 우장춘의 동생 홍춘이 태어났고, 나카는 어려운 형편 속에서 두 아이를 키워야 했다. 나카는 너무 힘이 들어 한 동안 큰 아들을 절에 딸린 고아원에 맡기기도 했다. 당시에 우장춘은 희멀건 감자 된장국을 많이 먹었으며, 그것은 나중에 가장 싫어하는 음식이 되었다고 한다. 나카는 배운 것도 없고 경제적 능력도 부족했지만,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며 살았다. 우창춘은 일본인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탓에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면에서 일본인으로 자랐다. 그가 평생 동안 우리말을 할 줄 몰랐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의 우장춘에 대해서는 ‘민들레의 교훈’로 불리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우장춘은 일본 아이들의 따돌림을 받고 길거리에서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길가에 피어 있는 민들레를 가리키면서 “민들레는 아무리 짓밟혀도 끝내는 꽃을 피운다. 네게 괴로운 일이 많겠지만 거기에 굴하지 말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길가의 들꽃 같이 굳센 사람이 되기를 주문한 셈이었고, 우장춘은 그 가르침을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한다.    우장춘은 1911년에 소학교를 마치고 히로시마 근처의 구레중학교에 입학했다. 구레는 바다에 접해 있는 소도시로 그 곳에는 일본 해군사관학교가 있었다. 구레의 많은 학생들은 생도들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고서는 사관학교에 들어가 멋진 군인이 되는 것을 꿈꿨다. 그러나 우장춘은 몸이 허약한 데다 성격도 소심해서 그러한 열망을 가질 수 없었다. 중학교 시절에 그는 눈에 띄는 점이 거의 없는 조용하고 평범한 학생에 불과했다. 다만 여러 과목 중에 수학은 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림 2> 구레중학교 시절의 우장춘(앞줄 오른쪽) ▣ 전문학교 출신의 연구원 당시 일본의 유명한 대학은 모두 국가가 운영하는 제국대학이었다. 그 중에서 도쿄제국대학과 교토제국대학은 관동과 관서 지역을 대표하는 최고의 명문 대학이었다. 중학교를 마칠 무렵에 우장춘은 교토제국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희망을 가졌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이 교토제국대학과 가까웠고, 공학을 배우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어 보였다. 그러나 우장춘의 집안 형편으로는 학비를 감당하기가 곤란했다. 다행히 아버지와 가까웠던 한국인 망명객들이 조선총독부로부터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우장춘은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데다 조선총독부도 한국인 망명객들에게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게 관비유학생이 될 수 있었다. 대신에 조선총독부는 자신이 지시하는 학교와 전공을 선택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당시에 일제는 한국인에 대한 관비유학생 제도를 운영하긴 했지만, 유학생 수를 최대한 억제한 가운데 전공도 농업이나 공업과 같은 실업 분야로 한정했다. 관비유학생의 신분도 정식 학력이 인정되지 않는 특별생이나 청강생인 경우가 많았다. 1916년에 우장춘은 조선총독부의 지시를 따라 도쿄제국대학 농학실과에 청강생 신분으로 들어갔다. 농학실과는 대학의 학부가 아니라 전문학교 과정이었고, 실습 위주의 교육을 시켜 실무에 밝은 농촌 기술자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도쿄제국대학 농학실과는 1935년에 도쿄고등농림학교로 독립되었고, 도쿄고등농림학교는 1944년에 도쿄농림전문학교로 변경된 후 1949년에는 도쿄섬유전문학교와 통합되어 도쿄농공대학이 되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우장춘이 도쿄제국대학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졸업했다는 것은 잘못된 정보에 해당한다. 당시에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한국인 학생들은 7백 명 정도였다. 그들은 조선유학생학우회를 만들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고 ‘배움의 빛’이라는 뜻의 잡지인 ≪학지광(學之光)≫도 발간했다. 그러나 우장춘은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다른 유학생들과 교류하지도 않았다. 그가 졸업한 1919년에는 3․1운동이 일어났지만 이에 대해서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우장춘은 농학실과를 다닐 때도 뛰어난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다행히 안도 코타로(安藤宏太郎) 교수의 추천으로 졸업 후에 농림성 소속의 농사시험장에 취직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고원(雇員)으로 고용되었지만 1년 후에는 기수(技手)로 정식 발령을 받았다. 우장춘의 농사시험장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농사시험장은 일본 최고의 농학 연구기관으로 도쿄제국대학을 비롯한 명문 대학 출신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주요 연구자들은 벼, 보리, 밀과 같은 주요 식량에 관한 주제를 다루었던 반면 말단 직원이었던 우장춘은 꽃을 다루는 인기 없는 부서인 원예부에 배치되었다. 그에게 배정된 첫 연구과제는 당시 관상용으로 널리 재배되고 있던 나팔꽃을 개량하는 것이었다. 우장춘은 나팔꽃을 매개로 식물의 유전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우장춘의 직장 생활이 안정되면서 집안 형편도 조금씩 나아졌다. 그는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려고 이웃집 아이를 가르치는 일도 했다. 이때 ‘와타나베 고하루(渡邊小春)’라는 네 살 아래의 여성을 만났는데, 그녀는 이웃집 여주인의 동생으로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소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 고하루의 부모는 우장춘이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지만, 고하루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1924년에 우장춘과 결혼했다. 그녀의 집안은 호적을 내줄 수 없다고 버텼으며 고하루는 집안과 의절한 채 살게 되었다. 혼인 신고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1926년 3월에 첫째 딸인 도모코(智子)가 태어나자 우장춘 부부는 더욱 난감한 신세가 되었다.   1926년 여름에 우장춘은 고노스(鴻巣)에 위치한 농사시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무렵 그의 집안과 가까이 지내던 스나가 하지메(須永元)가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고하루가 먼저 스나가 집안에 양녀로 들어간 다음에 우장춘이 데릴사위가 되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결국 우장춘은 일본 국적과 함께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라는 일본식 이름을 얻었다. 일본 국적과 한국 국적을 모두 갖게 된 것이었다. 일본식 이름이 자신이 살아가는 데 이익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우장춘은 ‘우’라는 성을 계속 고집했다. 그는 일본어 논문에서는 ‘우장춘’으로, 영어 논문에서는 ‘Nagaharu U.’로 자신의 이름을 표시했다. 아버지와의 연분을 유지하고 싶은 심리가 작용했는지, 아니면 오랫동안 사용해 온 성을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우장춘이 자신의 처지를 과장하지 않고 한번 세운 뜻은 철저히 지키는 성품의 소유자였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 승부욕이 강한 연구자 우장춘 부부는 위로 네 명의 딸과 아래로 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 우장춘은 집안에서 옛날 아버지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였다. 엄한 모습을 한 채 집안일을 거의 거들지 않았던 것이다. 고하루는 우장춘이 뜻대로 따라 주면서 힘든 일이 있어도 내색하지 않았다. 우창춘은 ‘불도그’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상 그의 외모는 불도그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다. 게다가 우장춘은 불도그와 같은 강한 승부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마작, 바둑, 장기, 화투와 같은 놀이를 할 때도 집요한 승부를 즐겼다. 특히 화투에 관심이 많아 치밀한 확률 계산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책까지 쓰려고 했다고 한다. <그림 3> 1950년에 우장춘이 귀국하기 직전에 찍은 가족사진. 왼쪽부터 부인 고하루, 넷째 딸 아사코, 장녀 도모코, 장남 모토하루, 우장춘, 차녀 마사코, 차남 스에하루, 셋째 딸 요오코. 우장춘의 승부욕이 가장 잘 발휘된 대상은 다름 아닌 연구였다. 그는 늦은 시간까지 연구에 매달렸고 어떤 때에는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다. 잠자리에 들 때는 머리맡에 종이와 빨간 펜을 두고 아이디어가 떠오려면 벌떡 일어나 메모를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우장춘에게 고민이 생겼다. 열심히 연구한다고 해서 앞날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고, 높은 자리로 승진하려면 좋은 학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우장춘은 박사학위에 대한 열망을 키워나갔다. 당시 일본에서는 대학의 정규 과정을 밟지 않아도 뛰어난 연구업적이 있으면 박사가 될 수 있었다.   우장춘에게 좋은 연구 재료가 된 것은 나팔꽃이었다. 나팔꽃을 자세히 보면 색깔이 매우 다양한데, 그 이유는 유전자가 변형되기 때문이다. 그는 다양한 나팔꽃으로 교배 실험을 하여 새로운 나팔꽃을 만들어내는 연구를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아주 특이한 나팔꽃을 찾아냈는데, 겉모습은 별로 다르지 않지만 염색체가 반만 있는 나팔꽃이었다. 나팔꽃의 반수체(감수분열의 결과로 염색체 세트의 수가 절반으로 줄어든 세포)에 대한 우장춘의 연구는 1930년에 일본의 유명 과학저널인 ≪유전학 잡지≫에 실렸다.     우장춘은 농사시험장 책임자의 권유로 피튜니아(petunia)도 연구했다. 남미가 원산지인 피튜니아는 서양 사람들에게 관상용으로 많은 인기를 누렸다. 문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완전한 겹꽃 피튜니아를 얻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겹꽃끼리 교잡을 해도 홑꽃이 섞여 나왔던 것이다. 우장춘은 사카타(酒田) 종묘회사가 제공한 피튜니아 종자로 꾸준한 실험을 수행했다. 결국 그는 여덟 겹을 가진 대형 피튜니아를 개발했는데, 그것은 절대우성 형질을 지녀 교잡을 해도 완전 겹꽃 피튜니아만을 생산해냈다. 이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사카타 종묘회사는 엄청난 수익을 올렸고, 우장춘은 그것을 논문으로 작성해 박사학위를 받고자 했다. 그러나 우장춘의 기대는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30년 가을에 시험장 본관 건물에서 누전으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여 완전 겹꽃 피튜니아에 관한 실험 기록이 모두 유실되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대형 겹꽃 피튜니아에 대한 소유권은 사카타 종묘회사가 독차지하게 되었다. 우장춘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실망감을 느꼈다. 다행히도 이 무렵부터 우장춘은 일본 과학계의 주목을 끄는 연구자가 될 수 있었다. 학회에서 여러 차례 초청을 받아 강연을 했고 논문도 잇따라 발표했다. 사실상 우장춘의 겹꽃 피튜니아에 관한 논문은 한 쪽짜리에 불과했다. 그는 불의의 사고로 실험 기록을 잃어버려 정확한 숫자를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논문 끝에 적었다.   ▣ 종의 합성을 입증한 우의 트라이앵글 화재가 일어나기 직전에 우장춘은 유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유채는 벼를 벤 뒤에 심어 다음해 모내기 전에 수확하는 두해살이 작물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농가 수익을 늘리기 위해 수확 시기가 빠르고 생산량이 많은 품종의 개발에 관심이 많았다. 어느덧 유채연구실 책임자가 된 우장춘은 두 명의 일본인과 함께 유채에 대한 연구를 추진했다. 우장춘 연구실은 일본 유채와 서양 유채를 교잡해 수확량이 우수한 잡종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일본 유채는 수확이 빠르지만 생산량이 적고, 서양 유채는 그 반대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우장춘 연구실은 겉모습이 비슷할 지라도 염색체가 저마다 다르고 그로 인해 교잡에도 상당한 어려움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에 따라 유채를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유전에 관여하는 염색체를 체계적으로 살필 필요가 있었다. 유채 연구는 1930년의 화재 사고도 피해갔다. 실험 자료의 대부분이 본관이 아닌 시험재배지에 있어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화재 사고는 추수가 끝난 늦가을에 발생했고 유채는 야외 밭에 심어져 있었던 것이다. 우장춘은 유채 연구에 대단한 애착을 가졌는데, 유채 잎을 생각해서 이듬해 태어난 셋째 딸의 이름을 ‘요오코(葉子)’로 지었다고 한다. 우장춘은 유채를 포함한 배추속(Brassica) 작물의 유전정보를 세밀히 관찰했다. 오늘날 유전체로 번역되는 게놈(genome)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던 것이다. 신기하게도 한 작물의 게놈을 구성하는 염색체의 수는 종이 다른 두 작물의 염색체수를 합친 것과 똑같았다. 가령 유채의 염색체수(38개)는 배추의 염색체수(20개)와 양배추의 염색체수(18개)를 합친 것과 동일했다. 우연의 일치일수도 있다고 생각한 우장춘은 실험실에서 그러한 현상을 재현해 보기로 했다. 우장춘은 배추와 양배추를 가지고 수많은 중간교잡 실험을 시도했으며 그 결과 유채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연구 성과는 ‘종의 합성이론’ 혹은 ‘우의 트라이앵글(U’s Triangle)’로 불린다. 우장춘은 종의 합성에 관한 주장을 최초로 입증하여 그것이 과학적 이론으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것이다.   <그림 4> 종의 합성을 입증한 우장춘의 삼각형에 관한 개요도. 배추(Brassica campestris), 양배추(B. oleracea), 유채(B. napus), 흑겨자(B. nigra), 갓(B. juncea), 에티오피아 겨자(B. carinata)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 우장춘이 규명한 종의 합성이론은 유전학, 진화론, 육종학의 측면에서 상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우장춘의 연구는 생물체들의 염색체 구성과 그것의 상호관계를 명쾌하게 밝힌 유전학의 우수한 성과에 해당한다. 또한 서로 다른 종의 교잡으로도 새로운 종이 탄생할 수 있다는 획기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 이전의 진화론은 자연선택이나 돌연변이를 통해 새로운 종이 출현한다는 점을 강조해 왔는데, 종의 합성이론은 진화의 새로운 메커니즘으로 교잡에 주목했던 셈이다. 아울러 우장춘의 연구는 농작물의 육종과 개량에 필요한 유전학적 토대를 마련하여 첨단 육종학의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처럼 우장춘의 연구는 매우 괄목한 것이지만, 이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지금도 인터넷 자료를 검색해 보면 “우장춘의 연구가 세계 최초로 다윈의 진화론을 논박하고 수정했다”는 식의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그러나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같은 종들의 교배를 통해서만 새로운 종이 출현한다고 주장하지도, 다른 종들의 교배를 통한 종분화가 불가능하다고 단언하지도 않았다. 또한 이미 1910년대부터 일본의 육종학자들은 인근 품종들의 배수성(ploidy)에 관한 연구를 통해 식물종의 진화를 탐구해 왔다. 특히 1930년에는 교토제국대학의 기하라 히로시(木原均)가 ‘게놈 분석’이라고 부른 염색체 분석 방법을 정립하여 밀의 종분화를 탐구하고 있었다. 우장춘은 이러한 연구전통 내에서 1935년에 배추속 품종 사이의 교잡 실험을 통해 해당 작물들의 상호관계를 밝혔던 셈이다. 종의 합성에 관한 우장춘의 논문은 1935년 ≪일본 식물학 저널(Japanese Journal of Botany)≫에 <배추속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영어로 작성된 이 논문은 염색체 이론을 바탕으로 종들의 게놈 구조와 그 상관관계를 무려 63쪽에 걸쳐 완벽하게 밝힌 대작이었다. 우장춘의 논문은 여러 국가에서 널리 읽혔고 유전학 교과서에도 실렸다. 이제 우장춘은 일본을 넘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과학자가 되었다. 우장춘은 <배추속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을 주(主)논문으로 삼고 부(副)논문 몇 개를 추가하여 1936년 5월에 38세의 나이로 도쿄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창춘이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소식은 일본의 언론에서 대서특필되었고 한국의 신문에도 짤막한 기사가 실렸다. 오랫동안 우장춘이 한국인 최초의 농학박사라고 알려져 왔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장춘에 몇 달 앞서 임호식(林浩植)이 곰팡이를 이용한 식품 연구로 홋카이도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학위를 받았던 것이다. ▣ 알에서 깨어 나오다 세계적인 논문을 쓰고 박사학위까지 받았지만 농사시험장에서 우장춘의 공식적인 직위는 달라지지 않았다. 무려 16년 동안 ‘기수’라는 하위직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우장춘은 자신의 실력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고 싶었다. 고위직인 기사(技師)로 승진할 수 있다면 외지로 나가도 좋다고 생각했다. 1937년 봄에 우장춘은 목화농장을 시찰하기 위해 한반도를 거쳐 중국의 칭다오로 출장을 갔다. 일본 농림성이 운영하던 목화농장의 책임자가 되고 싶다는 의지를 표현했던 셈이다. 그러나 우장춘의 기대는 희망사항으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일본 농림성 내부에서는 “중국인 가운데는 조선인을 경시하는 자가 많기 때문에 우장춘을 농장장으로 모시고서는 통솔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사실상 조선인의 피가 흐르는 사람에게 일본 관청의 높은 자리를 맡길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장춘에게 다가간 인물은 니혼대학을 졸업한 후 신문기자로 일하던 김종(金鍾)이었다. 김종은 우장춘이 뛰어난 과학자인데다 명성왕후 시해사건에 연루된 우범선의 아들이라는 점에 흥미를 가졌다. 김종은 종종 농사시험장을 방문하여 우장춘을 만났고 두 사람은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우장춘은 농사시험장에 사표를 낸 후 1937년 9월에 교토에 위치한 다키이(瀧井) 종묘회사의 초대 연구농장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회사는 우장춘에게 넓은 사택을 제공하고 한국인의 채용을 용인하는 등 특별한 대우를 해 주었다. 이에 반해 일본 정부는 퇴직 하루 전에야 우장춘을 기사로 승진시키는 행보를 보였다. ‘만년 기수’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임명한 ‘1일 기사’였던 셈이다.   김종은 우장춘과 한국을 연결하는 메신저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김종은 1937년 12월 28일 ≪동아일보≫에 <진화론의 신개척: 우장춘 박사의 학위논문 개요>라는 기사를 썼다. 김종은 우장춘에 대해 “바른 학자적 성격의 소유자로 일본에 있는 한국인 학자 및 기술자의 최고봉”이라고 평가했다. 김종의 주선으로 우장춘은 1938년 1월 14일에 <유전과학 응용하는 육종개량의 중요성: 조선은 아직은 처녀 시대>라는 글을 투고했다. 그는 “조선의 고유한 품종을 개량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진단하면서 “많은 노력과 지도와 분발을 부단히 해 주기 간절히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때부터 우장춘은 혈족을 찾아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으며, 1943년에는 조선다키이 종묘회사가 주최했던 제3회 전선소채과실품평회(全鮮蔬菜果實品評會)에 심사자로 참가하기도 했다. 우장춘의 새로운 거처가 된 교토는 한국인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특히 교토제국대학에는 ‘교토 3인방’으로 불리는 이태규, 리승기, 박철재가 있었다. 그들은 교토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교수나 강사로 활동하고 있었고 해방 이후에는 한국이나 북한을 대표하는 과학자로 활약하게 된다. 세 사람은 서로 친하게 지냈고, 우장춘도 종종 어울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치달으면서 리승기와 박철재는 일제를 비난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히기도 했으며, 우장춘의 집에도 사상범죄를 다루는 경찰이 자주 찾아왔다. 우장춘은 한국인들과의 다양한 만남을 계기로 일본 사회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자신을 찾아온 한국인 학생에게 “나 자신만을 위해서도 아니고 나라만을 위해서도 아니고 전 인류의 복지를 위하는 심정으로 과학을 한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림 5> ≪이태규 박사 전기≫ (동아, 1990), 124쪽에 실린 사진. 우장춘(왼쪽)이 1937년 9월에 다카이 종묘회사로 왔고, 이태규(가운데)가 1938년 12월에 미국 프린스턴 대학으로 유학을 갔으므로 그 사이에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1990년 당시의 남북관계를 고려하여 월북 과학자인 리승기(오른쪽)의 이름은 빠져 있다. 세 사람은 독립한 조국에서 다시 만나지 못했다. 우장춘은 자신을 뽑아준 다키이 종묘회사에 고마움을 느끼면서 최선을 다해 보답하고자 했다. 그는 농장의 연구기반을 빠른 시일 내에 구축하면서 회사에 도움이 될 만한 연구에 집중했다. 특히 우장춘은 경험적 기술에 의존하던 기존의 육종법을 지양하고 유전학을 바탕으로 육종의 과학화와 합리화를 추구했다. 1942년 7월에는 육종연구의 성과를 알리기 위해 ≪원예와 육종≫이라는 잡지를 창간했는데, 편집기자는 김종이 맡았다. ≪원예와 육종≫은 종묘회사가 발간하는 드문 잡지로 1943년 4월부터 ≪육종과 원예≫로 개명되었고 1944년 7월에 종간되었다. 당시에 각광을 받고 있던 육종기술은 서로 다른 품종을 교잡하여 우량한 잡종을 얻어내는 일대잡종(first filial generation, F1)기술이었다. 하지만 배추과 작물의 경우에는 자가수분(제꽃가루받이)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타가수분(딴꽃가루받이)을 하면 순도가 크게 떨어지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우장춘은 꾸준한 실험을 바탕으로 배추과 작물의 품종 개량에서 걸림돌로 작용한 자가불화합성(self-incompatibility)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서로 다른 일대잡종을 무수히 교배하여 화합성을 지닌 품종들을 찾아낸 후 그것들을 가지고 다시 교배를 실시함으로써 우량 품종을 만드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면 품질의 균일성은 조금 떨어졌지만 우량 품종을 대량으로 얻어낼 수 있었다. 우장춘은 1945년에 일본종묘협회가 주최한 제1회 종묘강습회에서 강연을 했고, 이를 바탕으로 ≪농업과 원예≫에 <채소의 육종기술>이란 논문을 연재했다. 우장춘은 당시에 개발된 최신의 육종기술을 유형별로 자세히 소개했으며 그 적용 방법까지 예시했다. 특히 자가불화합성을 해결하는 방법과 함께 웅성불임성(male sterility)을 이용하는 방법도 다루었다. 양파의 경우에는 화분의 불임현상을 일으키는 돌연변이를 만들어 효율적인 잡종 강세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장춘의 1945년 논문은 채소의 육종기술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결정판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장춘은 일본이 패전한 직후인 1945년 9월에 다키이 종묘회사를 그만 두었다. 당시에 회사의 소유주는 한국에 있는 자신의 농장이 몰수되지 않도록 우장춘에게 힘써 달라는 부탁을 했다. 우장춘은 그 요구를 거절했고 소유주와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자 사표를 내고 말았다. 우장춘은 정법사(正法寺)로 거처를 옮긴 후 지인들과 연구농장을 세워 운영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후 우장춘은 한국으로 건너올 때까지 다른 일자리를 구하지 않은 채 무위도식하며 지냈다. 어느덧 그의 나이도 오십대로 접어들었다. ▣ 연구와 생활을 함께 하는 공동체 그러던 중 1947년에는 우장춘 환국추진운동이 시작되었다. 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당시 경상남도 농림국장으로 재직 중이던 김종이었다. 그는 우장춘을 널리 알리면서 한국으로 데려오자는 여론을 모았다. 귀국 제의를 받은 우장춘은 오랜 고심 끝에 가족을 남겨두고 한국으로 오기로 결정했다. 경남지사를 지낸 김병규를 위원장으로 하는 ‘우장춘 환국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부산 지역의 인사들이 위원회의 회원으로 대거 참여했다. 환국추진위원회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백만 원을 마련한 후 일본에 있는 우장춘에게 보냈다. 1949년 4월 30일에는 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부산시 동래 일원에 한국농업과학연구소가 설립되어 우장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한국농업과학연구소는 1953년에 중앙원예기술원으로 개칭된 후 1957년 농사원 원예시험장, 1962년 농촌진흥청 원예시험장, 1994년 농촌진흥청 원예연구소를 거쳐 2008년에 국립원예특작과학원으로 개편되었다. 우장춘은 한국으로 온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 중앙원예기술원 원장, 원예시험장장을 잇달아 맡았다. 9년 5개월 동안 연구기관의 장을 맡았던 셈인데, 그것은 다른 국공립연구소의 책임자가 2～3년 만에 교체되었던 상황과 대비된다. 1950년 3월 8일에 우장춘은 수송선 신코마루(新興丸)를 타고 부산에 입항했다. 배에서 내린 그는 ‘환영 우장춘 박사 환국’이라고 적힌 현수막의 뒤를 따랐다. 10일 뒤에는 귀국환영회가 동래원예고등학교 교정에서 열렸다. 여러 곳에서 우장춘을 반기는 축전이 답지했는데, 처음 낭독된 것은 “귀국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대통령 이승만”이었다. 김병규 위원장은 환영사를 통해 “이렇게 곤란한 시기에 우장춘 박사께서 귀국해 주신 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고 말했다. 난생 처음으로 한복을 입고 나타난 우장춘은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 “저는 지금까지 어머니의 나라인 일본을 위해서 일본인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 각오입니다.” 당시 우장춘에게 한국은 아버지의 나라였고 자신의 나라로 부르기에는 어색했던 셈이다. <그림 6> 부산항에서 우장춘을 환영하는 시민들(왼쪽)과 귀국환영회에서 인사말을 하는 우장춘(오른쪽). 오른쪽 사진에서 한복 차림의 우장춘 옆에 있는 사람이 김종이다. 우장춘은 1950년 5월 10일에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했다. 연구소장 취임 직후에 그는 한국 농업의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전국의 농촌을 샅샅이 둘러보았다. 시찰을 마친 우장춘은 “이러한 상태에서는 한국의 농촌은 국민의 식생활을 지탱할 힘을 잃게 된다.”고 걱정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의 많은 농가들은 재래 종자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채소 종자의 경우에는 일본을 포함한 외국에서 무질서하게 반입하고 있었다. 한국의 열악한 농촌 실정을 돌아본 우장춘은 자신의 연구 방향을 새롭게 잡았다. 일본에서는 최신의 학문적 연구에 열정을 쏟았지만, 한국에서는 현실적 수요가 많은 실용적 연구에 치중하기로 했다. 한국 농업의 실정에 부합하는 ‘한국적 과학연구’를 지향했던 것이다. 우장춘은 연구소 사람들에게 학술적 연구는 뒤로 미룰 것을 요구했으며 그 자신도 연구논문을 쓰지 않았다. 한국농업과학연구소는 1952년부터 실질적으로 가동되었다. 우장춘은 농림부 장관직에 대한 제의도 거절하면서 오로지 연구에만 매진했다. 아침 일찍 실습장에 나와 채소와 꽃에 파묻혀 지내다가 밤늦게 귀가했다. 항상 작업복과 고무신 차림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고무신 박사’ 혹은 ‘고무신 할아버지’라는 별명도 생겼다. 우장춘의 연구소는 농림부 평가에서 사무능률, 근무태도, 직원의 신뢰, 책임의식 등 모든 면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다. 그는 한국에서 오해와 곤란을 겪기도 했다. 우리말을 할 줄 몰라 대화나 강의를 일본어로 하는 바람에 ‘친일파’라는 의심도 받았다. 한국 음식을 잘 먹지 못했고 김치는 너무 매워서 멀리했다. 배추의 육종 연구에 열정을 쏟았지만 김치까지 좋아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당시 한국에는 고등교육을 받은 연구자들이 크게 부족했다. 게다가 그들은 연구소를 기피하면서 조건이 더 좋은 대학이나 관청에서 근무하는 것을 원했다. 우장춘은 젊은이들을 자신의 연구소로 끌어들이기 위해 연구생 제도를 도입했다. 합숙 시설을 마련했고 외국어 교육도 시켰으며 징집 면제까지 주선했다. 연구생에 대한 교육은 현장 지도의 방식으로 실시되었다. 일터인 실습장에서 각 연구생에게 실제로 필요한 교육이 맨투맨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는 과제별로 특화된 여러 개의 연구팀을 구성하여 경력자가 초보자를 이끌도록 했다. 우장춘이 연구소 사람들에게 “눈빛이 식물의 잎을 뚫어 그 뒤까지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림 7> 우장춘 박사가 연구생을 지도하는 광경 사실상 우장춘은 연구소라는 집안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어른과 같은 존재였다. 연구소의 어느 누구도 우장춘의 말을 함부로 거스르거나 비판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부소장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해 자주 교체되기도 했다. 김종이 초대 부소장을 지내다가 우장춘과의 견해 차이로 연구소를 그만 두는 일도 생겼다. 연구소 사람들은 대부분 관사나 합숙소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인간적으로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들은 연구와 생활을 함께 하는 공동체를 이루면서 우장춘의 연구사업, 생활방식, 가치관 등을 서로 공유했다. 전북대 과학학과 김근배 교수는 이러한 공동체를 ‘장춘학파’라 부르고 있다. 장춘학파 중에서 우수한 연구자로 성장한 사람으로는 김동우, 최정일, 지계선, 현영주, 정덕교, 김영실, 홍영표, 김태욱, 진정기 등을 들 수 있다. 우장춘의 지도를 받은 후학들은 40여 명에 달했는데, 그들은 이후에 ‘원우회’를 조직하고 스스로를 ‘우장춘 교도’라 부르기도 했다. ▣ 채소의 종자 자립과 신품종 개발 채소의 품종을 개량하기 위한 육종연구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특히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잡다한 품종의 채소가 재배되어 왔기 때문에 순종을 찾기 힘들었다. 또한 재래 품종만으로 우량 형질의 채소를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당시에는 채소의 수확량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채소의 공급을 원활히 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였다. 우장춘은 이러한 문제를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하기 위해 연구사업을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추진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기존 품종에서 우량 품종을 찾아내 수입에 의존하던 채소 종자를 우리 스스로 생산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것은 다양한 재래 품종과 외래 품종 중에서 한국의 기후와 식성에 맞는 품종을 찾아내는 일에서 시작되었다. 이렇게 선발된 품종의 종자는 외지와 격리된 전라남도 진도에서 대량으로 생산되어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그 결과 1955년대 중반에는 한국이 배추, 무, 고추, 양배추, 호박, 가지, 양파, 파 등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채소는 일본으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이룬 최초의 분야로 평가되기도 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서로 다른 품종 사이의 교잡실험을 통해 우량 일대잡종의 시대를 여는 데 주력했다. 우장춘은 일본에서 수행한 연구를 더욱 발전시켜 잡종강세를 지닌 신품종들을 본격적으로 개발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60년대에 들어서는 배추 원예 1호와 2호, 양파 원예 1호와 2호, 양배추 동춘(東春) 등과 같은 신품종들이 잇달아 등장했다. 그 중에서 일대잡종 배추는 자기불화합성을 이용하여 개발한 세계 최초의 연구업적에 해당한다. 이러한 신품종들은 민간 종묘회사에 분양되어 한국 종묘산업의 태동과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이상과 같은 업적을 바탕으로 우장춘은 1957년에 농림부 장관 표창과 제1회 부산시 문화상을 받았다. 장춘학파의 성과는 여기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 채소 재배가 안고 있던 기생충 감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에서 처음으로 청정 재배를 시도했다. 또한 일본에서 도입한 귤나무를 시험적으로 재배하고 품종의 개량하여 제주도가 대규모 감귤 생산지로 발돋움하는 데 기여했다. 아울러 무병 씨감자의 시험 재배에 성공하여 황무지나 다름없던 강원도 대관령이 감자 특산지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우장춘은 대중을 상대로 한 강연에도 적극적으로 임했는데, 육종연구의 위력과 가치를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 ‘씨 없는 수박’을 자주 활용했다. 그는 강연회가 열릴 때마다 씨 없는 수박을 꺼냈으며, 연구소에서 재배한 씨 없는 수박을 시연해 보이기도 했다. 씨 없는 수박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널리 퍼졌으며, 1955년 대구에서는 경상북도 산업국 주최로 ‘씨 없는 수박 시식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장춘과 씨 없는 수박은 점점 일체가 되었고 급기야 우장춘이 씨 없는 수박의 ‘재배자’에서 ‘개발자’로 둔갑되기에 이르렀다. 사실상 씨 없는 수박은 앞서 언급했던 기하라 히토시가 1943년에 처음 개발했는데, 씨 없는 수박이 우장춘의 대표 업적으로 간주되는 촌극이 빚어졌던 것이다.   우장춘의 마지막 연구과제는 벼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작물인 벼에 관한 육종연구를 자신이 도달할 최종 목표로 정해 놓았다. 우장춘은 연구소 가장자리에 벼를 심어 관찰하기 시작했고 주곡을 자급할 새로운 벼 품종의 개발에 몰두했다. 우장춘이 일 년에 두 번 수확하는 ‘일식이수(一植二收)’를 연구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식이수는 우장춘의 전공 분야인 교잡을 이용한 육종연구와 별다른 연관성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벼에 관한 육종연구는 우장춘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는 바람에 뜻대로 진척되지 못했다. 그는 1959년 5월 원예시험장 창립 10주년 기념식을 마친 후에 십이지장 궤양이란 진단을 받았다.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 우장춘은 늘 일본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있었다. 당시에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전화 통화도 끊긴 상태라 편지로만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한번은 고하루가 남편에게 편지를 보냈다. “부디 저에 대한 것은 신경 쓰시지 말고 당신 필생의 사업인 한국 농업의 근대화와 농학 발전을 위해서 전력을 다해 주십시오. 아이들이 성장하면 저도 당신 곁에 갈 수 있겠죠. 저는 일본에서 그 날이 오기를 즐거이 기다리겠습니다.” 편지의 끝에는 “그대에게는 너무나 멀리 있는 침정화(沈丁花)”라는 글귀가 덧붙여졌는데, 첨정화의 한국명은 서향(瑞香) 혹은 천리향(千里香)에 해당한다. 이에 따라 고하루의 편지는 ‘천리향의 편지’로 불리고 있다. 1953년 어느 날, 우장춘은 ‘모친 중태’라는 전보를 받았다. 그는 즉각 출국 수속의 절차를 밟고자 했지만, 출국 허가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우장춘이 일본으로 가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결국 어머니 나카는 8월 18일에 8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모친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각지에서 조의금이 전달되었는데, 우장춘은 그 돈을 사용하여 농장 내에 우물을 팠다. 그 우물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젖’이란 뜻을 가진 ‘자유천(慈乳泉)’으로 명명되었다. <그림 8> 부산시 동래구 온천동의 우장춘기념관 내에 조성되어 있는 자유천 1955년경에는 부산 동래에 위치한 우장춘의 연구소가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명소가 되었다. 한번은 200명 정도의 여고생 일행이 연구소 견학을 왔다. 학생들의 강한 요구에 우장춘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오늘 이렇게 연구할 수 있는 것은 두 명의 여성 덕분입니다. 그 한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머니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나를 키워 주셨습니다. … 또 한 사람의 여성은 아내입니다. 아내는 결혼해서 줄곧 ‘가정의 일은 저에게 맡겨 주시고 당신은 연구에 전념해 주세요.’라고 말했지요. … 내가 연구의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특별히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 어머님과 아내, 이 두 명의 여성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언젠가는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부디 남편과 자식들로부터 사랑받고 존경받는 여성이 되어 주세요.” 우장춘은 1959년 8월 10일에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떴다. 61년 4개월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임종 3일 전에 한국 정부는 우장춘에게 건국 이래 두 번째로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이 자리에서 우장춘은 “나의 조국이 나를 알아주었어. 그것만으로도 나는 기쁘다네.”라는 말을 남겼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장례는 수많은 사람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시신은 농학연구기관들이 운집한 수원의 여기산 기슭에 묻혔다. 1960년 4월에 열린 묘비 제막식에서 시인 이은상은 다음과 같은 추도사를 바쳤다. “불우와 고난 속에 진리를 토파내어/ 종자합성 새 학설을 세계에 외칠 적에/ 잠잠턴 학문의 바다 물결 한 번 치니라/ 온갖 채소 종자 우리 힘으로 길러내어/ 겨레를 위하시니 그 공로 얼마던고/ 빛나는 문화포장을 웃고 받고 가니라/ 흙에서 살던 인생 흙으로 돌아가매/ 그 정신 뿌리 되어 싹트고 가지 뻗어/ 이 나라 과학의 동산에 백화만발하리라.” 세월이 흘러 1998년은 우장춘 탄생 100주년이 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부산시는 1999년에 옛 원예시험장 자리인 동래구 온천동에 ‘우장춘기념관’을 세웠다. 이어 2000년에는 동래구 미남 교차로에서 식물원 입구까지의 산복도로가 ‘우장춘로’로 명명되었다. 같은 해에는 배추과 게놈연구 국제컨소시엄이 결성되면서 한국 배추가 표준 연구품종으로 선정되었는데, 그것은 우장춘의 연구전통이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다는 징표에 해당한다. 2003년에 개관된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도 우장춘을 초대 헌정대상자로 모셨다. 2006년부터 부산시 동래구와 부산과학기술협의회는 해마다 우장춘 박사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 [참고문헌] 오동훈, “겨레의 농학자 우장춘”, 박성래 외, ≪우리 과학 100년≫ (현암사, 2001), 272-291쪽. 김근배, “우장춘의 한국 귀환과 과학연구”, ≪한국과학사학회지≫ 제26권 2호 (2004), 139-164쪽. 김근배, ≪우장춘: 종의 합성을 밝힌 과학 휴머니스트≫ (다섯수레, 2009). 쓰노다 후사코(오상현 옮김),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 (교문사, 1992); 츠노다 후사코(우규일 옮김), ≪나의 조국: 우장춘 박사 일대기≫ (북스타, 2019). 김태욱, ≪마음속에 살아있는 인간 우장춘≫ (신원문화사, 1984). 이종호, ≪한국의 과학 천재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과학자들≫ (북스타, 2016). 정종현, “과학과 내셔널리즘: ‘해방전후’ 과학(자)의 이동과 우장춘 서사의 과학 담론을 중심으로”, ≪상허학보≫ 제39집 (2013), 207-249쪽.

최영도		우장춘님의 뒷편까지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일근님의 시 한 수 감상해보시죠! ☞ ‘사랑의 모습 사랑의 뒷편’(정일근)	2022-08-22 11: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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