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에 여전한 ‘슬픈 나막신’ 이기철  (Homepage) 2025-07-03(목) 07:44:33, 10827

≋ 권정생 씨앗 ≋ 아이들은 기다린다 1944년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때 일본 도쿄 시부야구 하타가야 혼마치 골목에서는 몇 아이들이 즐겁게 놀고 있었다. 이곳은 당시 재일동포(在日同胞)들이 거주하던 공장지대였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홍수가 빈번했던 강가였으며,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B-29 폭격 공포가 도시를 침탈하고 있었지만 공습(空襲)이 멈춘 때 잠깐 허락된 평화를 즐기는 시간, 국적과 상관없이 어울려 놀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허락된 놀이는 슬픈 사연이 있다. 전쟁은 모든 이를 떨게 하지만 더 무서운 배고픔이 기다리고 있다. 한술이라도 입에 떠넣으면 다행인 나날. 아이들은 오늘 저녁은 밥을 먹을지, 떡을 먹을지, 죽을 먹을지, 굶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막신 한 짝에 희망을 건다. ‘분이’라는 아이가 하늘 높이 찬 나막신은 나뭇가지에 걸린다. 최악이다. 밥을 굶게 된다는 징조다. 신발 점(占)은 어찌 그리 틀리지도 않는지. 그날, 분이는 끼니를 챙기지 못했다. 똑바로 땅바닥에 떨어지면 ‘밥’인데 말이다. ‘아이들은 기다린다’는 권정생 선생이 쓴 장편 동화, ‘슬픈 나막신’에 얽힌 여러 이야기를 한데 모아두었다. 만든 이는 판화가 이철수 선생, 이기영 동화작가 등이 참여한 ‘권정생 씨앗’. 그분 작품이 널리 읽히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지은 이름이다. 이들은 올해 ‘슬픈…’이 출간된 50주년을 기념해 이 책을 펴냈다. (아쉽지만 비매품이다). 지난해에는 ‘몽실 언니’ 40주년을 맞아 ‘오늘 몽실 언니를 만났다’를 낸 바 있다. 이 작품을 쓸 때 겪은 에피소드, 출판 과정, 일어판 발간과 혼마찌 현지 기행문, 말꽃, 독후감 아홉 편 등이 실려있다. 이 동화를 쓸 때 제목은 ‘겨울 망아지들’이었지만 1975년에 ‘꽃님과 아기 양들’로 출판됐고 2022년 ‘슬픈 나막신’으로 마침내 긴 여정을 마쳤다. 그로서는 첫 장편 동화였다. 이 작품이 나오기까지 이오덕 선생이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이원수, 이현주 작가도 발 벗고 나섰지만 사정은 만만하지 않았다. 출판사 형편도 있었지만 정작 저자 마음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등장인물이 일본말 이름이어서 고쳐야 한다, ‘조선’은 ‘한국’으로, ‘조센징’은 ‘한국 사람’으로 바꿔야 한다는 요청 등이 그랬다. 삽화(揷?)도 문제가 있었다. 권 선생은 “문학 표현에 있어 작가 의도를 훼손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며 완곡하게 거절했지만 마지못해 요구한 대로 수정해주고 만다. ‘겨울 망아지들’이라는 제목도 지키고 싶어 했다. 전쟁 고통 속에서 뛰어놀던 벌거숭이나 다름없던 친구들을 잊을 수 없었기에 말이다. 병마와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아낀 작품이다. 이 동화는 작가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이다. (선생이 태어난 곳은 일본 도쿄 시부야 하타가야 혼마찌 3정목 595방(番)이다) 대신 그는 일인(日人) 작가를 능가하는 작품을 쓰고 싶어 했다. 이 소원은 재일 조선인 2세 작가인 변기자 씨(2012년 3월, 72세로 사망)에 의해 번역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녀는 창비 어린이 2009년 가을호에 발표한 기행문, ‘소년 권정생도 여기에 왔을까?’를 실은 바 있다. 동화 배경이 된 혼마찌 골목 탐방이었다. ‘정생’ 할아버지는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 속에서 처절하게 살아남았다. 작품에는 분노나 이념은 없다. ‘같이’를 ‘가치’로 삼았다. 그에게 있어 ‘말’은 상대를 해(害)하는 ‘총’이 아니라 다정함을 전하는 ‘꽃’이었다. ‘말꽃’으로 분류된 한 문장을 같이 읽어보자. ‘빌뱅이 언덕’ 인근 마을은 올봄 큰 산불로 아픔을 겪고 있다. 사람은 가고 없어도 ‘사랑’은 남는다지 않는가? ‘슬픈 나막신’은 우리 곁에 여전히 남아있다. 힘내시라. 힘내라, 힘. 모두. “너희들은 어디서 왔니”/ 할아버지가 먼저 두 아이들을 보고 물었다. 곁에서 쳐다보니, 할아버지 눈빛이 맑게 빛나 보였다./ “할아버지, 혼마찌에 가자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나요?”/ “길을 잃었다는 거군. 아니야. 너희들이 길을 잃은 게 아니고, 길이 너희를 두고 가 버렸어.”/ ‘뭐라고 하셨어요? 할아버지?”/ 하나꼬는 이상스럽게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 “하지만 다시 찾을 수 있을 거야.” <‘슬픈 나막신’, P. 220-221에서> 이기철 작가 ☞ [울산제일일보 * 이기철 작가와 ‘책 한 권 드실래요?’]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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