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풍추상 - 다시 생각해볼 말4 김영국  (Homepage) 2022-11-05(토) 06:17:19, 42458

춘풍추상은 채근담에 나오는 ‘待人春風 持己秋霜’을 줄인 말이다.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과 같이 부드럽게 하고, 자신에게는 가을서리처럼 엄격하게 하라는 뜻이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초에 청와대 모든 비서실에 춘풍추상 액자를 내렸다는 기사를 보았다. 임기 초반의 분위기를 걱정하는 대통령의 시의적절한 처사라고 생각했다. (다만 하필 신영복의 글씨인 게 살짝 마음에 걸렸다.) 그래 놓고 그는 반대 방향으로만 갔다. 상대 세력에 대해서는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시대 사화士禍나 환국換局, 북한의 숙청을 방불케 하는 정치보복을 하더니, 자기편의 허물에는 가을서리가 아니라 솜이불을 겹겹이 덮었다. 내로남불의 전형이었다. 춘풍추상이 아니라 추상춘풍이었다. 춘풍추상이 현실 세계에서 가능이나 할까. 실제로 그렇게 산 사람이 몇이나 될까. 특히 그렇게 정치를 한 위정자가 있긴 있었을까. 자기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음으로 양으로 도와준 사람에게, 앞으로 자신의 방패막이가 돼줄 패거리에게 서릿발처럼 엄하게 대할 수 있을까. 말이 읍참마속이지 마속이 부지기수인데 그들을 다 베어버리고 어떻게 자기 자리를 보전할 수 있겠는가.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도 했다. 이런 말이 속담으로 전해온다는 것은, 개인이나 집단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다들 내로남불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춘풍추상은 힘 있는 자들의 위선적 구호였을 뿐이었다. 반면에 순진한 일반국민은 자기반성, 자기책망이 미덕이라 믿으며 살아왔다. 미국 이민 초기의 일이다. 할머니가 집안일 하는 사이에 손주가 사고로 죽었다. 할머니는 경찰에서, 법정에서 일관되게 자기가 손주를 죽였다고 자기가 죽어야 한다고 진술했다. 한국의 독특한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경찰이나 법관이 많이 헷갈렸을 것이다. 한국인은 주변에 문제가 생기면 먼저 자기를 돌아보고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아 자책하고 자학한다. 남의 잘못은 밖으로 드러난 것만 보이는데 반해, 자기의 잘못은 마음속까지 들여다보게 된다. 그런 자신을 추상같이 재단하며 괴로워하는 의식구조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춘풍추상은 높으신 분들의 정치행태는 건드리지 못하고 힘없는 백성들만 괴롭혀온 셈이다. 이 세상에서 나와 가장 오래 함께 살아갈 사람이 누구인가. 부모님은 일정시점까지고, 배우자와 자식은 일정시기부터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야말로 나와 일심동체로 함께 할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나 혼자뿐이다. 그런 나에게 우리는 너무 가혹하다. 여리고 착한 나에게 현미경 들이대어 흠을 찾아내고 그때마다 담금질하며 살아간다. 춘풍추상은 그렇게 살라는 뜻이다. 그렇게 살면 성인군자,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다그친다. 그러나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은 도덕군자는커녕 맥빠진 루저가 될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스스로 만든 상처로 기진맥진한 상태로 어떻게 이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아직 춘풍추상이 개인 차원에서나 사회 차원에서 도달해야 할 고지인 양 추앙받고 있다. 자존감 개념을 처음 정립한 심리학자 나새니얼 브랜든은 자존감의 바탕인 자기사랑에 대해 재미있게 얘기했다. ‘이 세상에서 반드시 성공시켜야 할 첫사랑이 있다면 바로 자신과의 사랑이다. 그 사랑을 성공시킨 후에야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을 준비가 된다.’ 비행기 비상상황에서 산소마스크를 자기가 먼저 착용하고 남을 도와야 한다는 수칙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자신과의 첫사랑마저 실패하도록 길들여져왔다. 일일삼성一日三省하고 춘풍추상하고 또 자기와 싸워 이겨야 한다고 배워왔는데 어떻게 자기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남을 사랑하고, 남에게 친절하고, 남을 용서하는 사람을 우리는 좋은 사람이라 이른다. 그런 따뜻함과 너그러움을 자신에게도 베풀어야 한다. 그래야 자존감이 싹틀 수 있기 때문이다. 근육이 육신의 힘이라면, 자존감은 정신의 근육이다. 자존감은 정신의 기둥이고, 면역력이고, 회복력이다. 자존감은 자기사랑, 자기 존중, 자기친절을 먹고 자란다.   혜민 스님이 하버드 재학 초기에 겪었던 일화다. 대인관계에 나름으로 신경을 썼다. 그럼에도 몇몇은 도저히 편안해지지 않았다. 그들이 곁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 가까운 친구들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방법을 물었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자신에게 착한 사람이 되세요.” 그들의 눈에 한국인 혜민의 춘풍추상이 도드라져 보인 것이다. 혜민의 그런 태도가 그들에게 생소하고 불편했던 것이다. 자신에게 착한 사람이 되라는 말을 우리는 한 번도 듣지 못하고 자랐다. 그런 생각이 행여 겉으로 드러나기라도 하면 이기적이고 비도덕적인 사람으로 지탄받는 사회에서 우리는 배우고 자랐다. 남의 실수나 잘못을 보고 해주는 말을, 이제 나 자신에게도 해주고 나를 다독여주자. 춘풍추상이 아니라 춘풍훈풍春風薰風으로 살자는 얘기다. “괜찮아. 괜찮아.” “그럼 좀 어때.” “그럴 수도 있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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