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롯의 힘 김영국  (Homepage) 2022-07-17(일) 07:49:26, 31447

트롯 가수 장민호 이찬원의 콘서트에 갔다. 아내가 장민호 열성팬임을 알고 둘째가 티켓을 보내왔다. VIP석에 요금이 무려 십삼만원이었다. 무대 바로 아래쯤 되려나 했는데 웬걸 KBS 1층이 전부 VIP석이었다. 그 넓은 1층이 꽉 차있었다. 2층도 빈자리가 없었다. 다들 돈이 이렇게들 많나. 인기가 이 정도였나. 같은 장소에서 오래 전 나훈아 콘서트를 본 적이 있다. 그때도 만석이었지만 연령대가 지금에 비하면 훨씬 높았다고 기억된다. 백발의 70대 할배가 앉아있을 물이 아니었다. 오늘의 콘서트는 나훈아 쇼에 아이돌 콘서트를 섞어놓은 듯했다. 지하철역에서 방송국으로 가는 길에는 가수들의 이른바 굿즈(의상, 형광봉 등)를 파는 가판대가 길게 늘어서있었고, 좁은 광장엔 두 가수의 팬클럽 전용 관광버스와 미니버스가 버티고 있었다. 무대 앞은 두 가수의 굿즈로 무장한 광팬들이 점령하여 경쟁하듯 분위기를 이끌었다. 레파토리가 트롯 위주라는 점은 나훈아와 닮았으나, 청중들의 리액션이나 응원은 아이돌 팬덤들과 같았다. 나훈아 때와는 달리 나는 끌어다놓은 보릿자루였다. 밖에는 두 시간이나 남은 밤 공연을 기다리는 덕후들이 줄지어 앉아있었다. 대략 3~50대의 아줌마들이었다. 가정은 다들 어째놓고 저러고들 있을까. 학업을 팽개치고 덕질하던 10대 오빠부대가 트롯 콘서트 장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아, 트롯의 반전이 눈부시다. 2019~21년은 온 나라가 코로나로 얼어붙었다. 이 시기에 어떤 문화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문학도, 영화도, 클래식도, K-팝도 국민과 함께 동면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 했던가. 가수도 애호가도 ‘샤이 트롯’에 빠져 위축돼있던 트롯이 이 와중에 경칩에 개구리 깨어나듯 기지개를 켰다. 기지개가 훈풍이 되고 열풍이 되었다. 느닷없는 트롯의 열풍에 국민들이 코로나 우울증을 떨치고 일어났다. 이 열풍의 근원은 한 종편방송의 트롯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다. ‘미스 트롯’은 슈퍼스타 송가인을 배출하고 꺼져가는 트롯에 불씨를 당겼다. 이듬해 ‘미스터 트롯’은 드디어 전국에 메가톤급 트롯 폭탄을 터뜨렸다. 임영웅 영탁 이찬원 김호중 정동원 장민호 김희재 이른바 톱 세븐은 모두가 세대를 아우르는 시대의 영웅으로 등극하였다.   방송사는 그들을 중심으로 후속 프로그램을 만듦으로써 그 열기를 그대로 이어갔다.  ‘용두산아~’, ‘미아리이 눈물 고개~’를 함께 부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망각 속에 묻혀가던 ‘막걸리 한 잔’, ‘진또배기’로 어깨를 들썩였다. 예술의 기능을 학문적으로 따지면 끝이 없을 것이다. 지금 트롯이 하고 있는 일이 그 기능의 핵심이 아니겠는가. 막힌 감정 시원하게 뚫어주고, 가라앉은 기운을 북돋우어주고, 아픈 심신 위로해주고, 우울을 신명으로 바꿔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기능이 뭐가 있겠는가. 이 어려운 시절에, 어느 예술도 못한 일을 트롯이 해낸 것이다. 사람 팔자 시간문제라 했던가. 사람뿐이 아니다. 예술의 운명도 그런가 보다. 트롯은 일제강점기와 5~60년대, 그 어려웠던 시대에 우리 국민들의 애환을 오롯이 담아낸 유일한 그릇이었다. ‘황성 옛터’ ‘추억의 소야곡’ ‘전선야곡’ ‘동백아가씨’ 들이 없었다면 그 어려운 시절을 견뎌내기가 훨씬 더 팍팍했을 것이다. 그런데 70년대 이후 우리의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자 서양에서 들어온 재즈 발라드 힙합 등이 트롯을 구석으로 변두리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급기야 트롯의 무대는 ‘가요무대’와 노인 대상의 지방행사로 쪼그라들면서 존망의 위기에 몰린 것이다. 그 트롯이 이 절체절명의 시기에 온 국민을 일으켜 세우는 큰일을 해내었다.  트롯의 부활은 그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다. 나는 우리 세대와 함께 트롯도 저물어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건 착각이었다. 이번 트롯 열풍으로 트롯 가수와 그 애호가들이 많이 젊어졌다. 정동원, 김다현, 김태연은 이제 막 중학생이 됐거나 아직 초등학생이다. 뿐만 아니라 케이팝의 아이돌, 민요 가수 출신이 대거 합류하면서 노래도 창법도 무대매너도 많이 다양해지고 젊어졌다. 쇠잔해가다가 발딱 일어났듯 또 어느 순간 트롯이 옛날처럼 비주류로 밀려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 현대사를 함께 하며 진화해온 트롯이 그렇게 쉽게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우리가 어려울 때마다 제 기능을 다해 온 저력을 트롯은 장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성인은 물론 젊은이들까지 우리의 트롯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유행가나 선전가요를 트롯 스타일로 즐겨 부르고 있다고 한다. 통일의 그날, 트롯은 남북의 정서를 하나로 묶어내는 동아줄이 될 것이다. 트롯이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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