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캔 스피크 김영국  (Homepage) 2018-06-20(수) 19:45:56, 2126

배우 나문희 얘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위안부 얘기는 더욱 아니다. 내 영어 얘기다. 나의 영어 회화 실력은 바닥 수준이다. 입국 심사대에서 우리 부부는 언제나 묵비권을 행사한다. 아래 위를 살핀 심사원은 웃으며 통과시켜준다. 그런데 몇몇 사람은 내가 영어를 굉장히 잘하는 줄 알고 있다. 그 사람들이 이 글을 읽을 리 없겠지만 그래도 털어놓아버려야 저승길이 가벼울 것 같다.^^                                   1 군대 말년에 철원의 한 초소를 맡은 적이 있다. 소대 병력이 배치되었지만 별로 할 일이 없어 나는 잠옷 차림으로 막사의 야전 침대에서 뒹구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초소에서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 미국 군인이 와서 떠드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 당시 우리 소대는 중졸이 최고 학력으로 기재계를  맡을 정도였으니 영어는 구경도 못해본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미군 지프가 차단 장치 앞에 멈추어있고 미군 몇 명이 서성이고 있었다. 장교 계급장을 단 나를 보고 반색을 하며 경례를 했다. 그들도 위관 장교였다. 이제 말이 통하겠다고 기대를 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못하다는 걸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i'm sorry. I can't speak English." "I'm sorry, too. I can't speak Korean." 상황을 눈치 챈 미군은 지도를 내 눈앞에 들이대며 떠들기 시작했다. 산허리를 두르는 군사도로를 이용하여 이웃 사단으로 가겠다고 했다. 동절기 내내 출입을 통제할 만큼 위험한 도로였다. 더욱이 며칠 전 내린 눈이 다 녹지 않고 얼어붙은 상태라 출입을 철저히 막으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안타깝게도 그것을 내 영어 실력으로 어떻게 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병사들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황해선 안 된다. 머뭇거려도 안 된다. 그래 단어를 나열하자. “눈.” “얼었다.” “미끄럽다.” “매우 위험하다.” “불가능하다.” “금지되었다.” 등을 웃으며 진지하게 반복했다. 그들도 미소를 띤 채 열심히 떠들었으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으음.”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역시 장교는 국제 신사였다. 지도를 접으며 경례를 붙이고 선선히 돌아갔다. 대학 나온 소대장을 잔뜩 기대한 소대원들 앞에 더듬거린 게 못내 아쉽고 쪽팔렸다. 그런데 소대원들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초병들이 뭐라고 소문을 냈는지 우리 소대장님 어떻게나 영어를 수알라수알라  잘하는지 미군 장교가 꼼짝도 못하고 돌아갔다고. 역시 우리 소대장님 최고라고. 내가 전역할 때까지 금학산 자락의 전설로 회자되었다.                                   2 연산동에 살고 있을 때의 일이다. 퇴근길에, 서양 청년 두 사람이 식당의 아줌마에게 뭔가를 묻는데 아줌마가 손사래를 치는 광경을 목도했다. 그래 아줌마가 영어를 할 수 없지. 내가 도와줄까. 돌아 나오는 그들을 기다렸다가 말을 붙였다.(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May I help you?"   “7통 3반이 어디예요?” 또록또록한 한국어가 돌아왔다. 황당하고 난감했다. 다행히 집 근처 철물점 아저씨가 통장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거기로 데리고 가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물론 한국어였다. 연산동 어딘가 본부가 있다는 모르몬교 신도였다. 담소하며 가는 동안 우리 애 친구들이 먼발치에서 놀다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지나가던 동네 아줌마들도 힐끔힐끔 보며 눈인사를 했다. 철물점 아저씨에게 인계를 했다. 그들은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나는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응답했다. “You're welcome!" 다음 날 학교에 다녀온 애가 친구들의 얘기를 자랑스럽게 전했다. “아빠, 영어 잘 한다고 애들이 야단이던데.” 목욕탕 다녀온 아내도 미심쩍은 표정으로 아줌마들의 말을 전했다. “00 아빠 국어 선생이라더니 영어도 잘하시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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